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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장석주의 사물극장] [31] 시인 김관식과 '명함'

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입력 2018.02.01 03:11



한국전쟁이 끝나고 환도하자 서울 명동을 중심으로 다방 문단사가 펼쳐졌다. 그 무렵 김관식(金冠植·1934~ 1970)이 충남 논산에서 상경했다. 그는 한학(漢學)의 대가인 정인보(鄭寅普), 오세창(吳世昌), 최남선(崔南善)에게서 '주역' '반야심경' '동의보감' '당시(唐詩)'를 배웠는데, 스승에게서 신동 소리를 듣던 사람이다. 문단 거물인 김동리, 조연현, 박목월을 감히 김군, 조군, 박군이라 부르고, 시집 출판기념회에 나타나 "눈자위 사나웁게 흰창을 흘"기며 판을 엎었다. 그는 서정주 추천으로 '현대문학'을 통해 시 '()', '계곡에서'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마포 공덕동의 서정주 집을 드나들며 시인의 아리따운 처제에게 눈독을 들였다. 김관식은 청혼을 거절당하고 음독자살 소동 끝에 시인의 처제 방옥례와 결혼에 성공해 서정주와 동서지간이 되었다.

김관식, 정인보, 오세창, 최남선

김동리, 조연현, 박목월, 장면

김관식은 4·19 뒤 '나라가 위급할 때 시인이라고 별유천지에서 희희낙락할 수 없다'면서 국회의원 출마 선언을 했다. 신문사 논설위원직도 내놓고 용산 갑구에서 정치 거물인 국무총리 장면과 맞붙었다. 그는 '대한민국 김관식'이란 명함을 돌리며 선거 유세에 나섰다. 결국 3등으로 선거에서 떨어졌지만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20대 초반 한학 실력과 한시 소양에서 비롯된 기개와 자만심으로 문단을 휘젓고 좌충우돌하던 김관식은 인왕산 일대의 국유지를 개간해 과수원을 만들고 판잣집을 지어 살았다.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올라온 가난한 시인들에게 땅을 나눠주며 정착을 도왔다. 가난했지만 시인의 박람강기(博覽强記)와 호연지기를 누구도 꺾을 수는 없 었다. 30대 들어서면서 시인의 간과 위장과 신장은 질곡의 세월을 건너면서 들이켠 깡소주에 녹아내렸다. 시인은 병고에 시달리다가 36세 때 어린 자식들에게 판잣집 한 채와 "가난함에 행여 주눅 들지 말라./사람은 우환에서 살고 안락에서 죽는 것,/백금 도가니에 넣어 단련할수록 훌륭한 보검이 된다."라는 시를 유산으로 남기고 세상을 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1/31/2018013103312.html


「蓮」/ 金冠植

수천 만 마리
떼를 지어 날으는 잠자리들은
그날 하루가 다하기 전의
한뼘가옷 남짓한 날빛을 앞에 두고
마지막 안쓰러운 저녁 햇살을 다투어
얇은 나래야 마스러지건 말건
불타는 눈동자를 어지러히 구을리며
바람에 흐르다가 한동안은 제대로 발을 떨고 꼰두서서
어젯밤 자고온 풀씨밭을 다시는 내려가지 않으려는듯
갓난이 새끼 손가락보다도 짧은 키를 가지고
허공을 주름 잡아 가로 세로 자질하며 가몰 가몰 높이 떠 돌아 다니고 있었다.

연못 가에서는
인제 마악 자라나는 어리디 어린 아그배나무 같이
물오른 아희들이 웃도리를 벗고 서서
그 가운데 어떤 놈들은 물속만을 드려다 보고
제가끔 골돌한 생각에 잠겼다.

허전히 무너져 내린 내 마음 한구석의 그 어느 개흙밭에선
감돌아 흐르는 향기들을 마련하며
蓮꽃이 그 큰 봉오리를 열었다.
―(1955년 『현대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