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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법원행정처가 나를 악용" 검찰 불려간 판사들의 배신

조백건 기자

입력 2019.08.06 03:00 | 수정 2019.08.06 11:49


사법권 남용 재판서 책임 떠넘기며 선처 호소한 행태 드러나


A 부장판사는 작년 9월 A4 용지 10쪽 안팎의 자필 '진술서'를 검찰에 냈다. 당시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의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가 한창이던 때였다. 그는 외부 기관 연구관으로 파견 근무를 하면서 그곳의 내부 정보를 '양승태 행정처'에 수시로 보고한 혐의로 수사받고 있었다. 그는 문건에서 "저는 법원행정처에 계신 분들에 의해 철저히 이용됐다. 법원행정처가 저의 보고 내용을 음모나 정치의 영역에 악용하였음을 알고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며 "저의 억울함이 없도록 잘 살펴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린다"고 했다.



수사받는 사람이 수사기관에 선처를 호소할 수 있다. 판사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법조계 인사들은 "선호 보직인 연구관으로 일할 때는 말이 없다가 사건이 터지니 '행정처가 나를 악용했다'며 책임을 선후배 판사들에게 다 떠밀었다"고 했다. 외부기관 파견자로부터 그곳 내부 사정을 듣는 것은 정도의 문제일 뿐 과거 다른 기관에서도 종종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마치 자신은 모르는 상태에서 법원행정처가 엄청난 악행을 저지른 것처럼 썼다는 것이다. 검찰은 수사에 협조한 A 부장판사를 불기소 처분했다.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 재판이 최근 본격화되면서 검찰이 수사 중에 확보한 여러 진술과 물증들이 재판을 통해 공개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자기의 구명(救命)을 위해 모든 책임을 다른 판사들에게 돌리고, 동료 판사를 비방하는 투서를 넣은 사례 등 그동안 공개되지 않은 '판사들의 뒷얘기'가 속속 알려지고 있다. B 판사는 '양승태 행정처'에서 2년 가까이 심의관(평판사)으로 일했다. 잘나가는 판사였다. 그는 양 전 대법원장이 퇴임하고 김명수 대법원장이 취임한 직후인 2017년 10월 김 대법원장 지시를 받고 보고서 하나를 올렸다. 제목은 '법원행정처의 문제점'. 사실상 '양승태 행정처' 문제를 지적하는 글이었다. 그는 보고서에서 "대법원장이 임기(6년) 동안 뭔가 업적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문제의 근원"이라며 "법원행정처 차장 등 간부들은 (대법관이 되려는) 고3 수험생들이다. 대법원장에게 충성을 다할 이유가 충분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어 "행정처 간부들이 (상고법원 도입 등을 위해) 국회의원 사건의 예상 결과를 상담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고 들었다"고 했다. 실제 김 대법원장은 이후 이 사건에 대한 3차 조사를 벌여 B 판사가 말한 '재판 거래' 의혹을 집중 조사했다. 그는 보고서 말미에 "(김명수) 대법원장께서 사법행정의 신기원(新紀元)을 열어주시길 기대한다"고도 했다. 보고서 내용을 접한 상당수 판사는 "책임을 윗선에 밀고 자기만 빠져나가려고 쓴 반성문"이라고 했다.

검찰 조사를 받은 직후 온갖 자료를 싸들고 수사 검사를 다시 찾아오는 판사도 꽤 있었다고 한다. 김 대법원장 취임 후 '양승태 행정처' 간부의 비위 등을 고발하는 투서가 대법원에 날아들기도 했다. 법원 관계자는 "비슷한 시기 행정처에 근무한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을 정도로 투서 내용이 구체적이라 놀랐다"고 했다. 최고위 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법원행정처 고위 간부를 지내는 등 '양승태 사람'으로 통했던 C 판사와 D 변호사는 검찰 조사에서 "법원행정처 판사들이 나를 통하지 않고 부적절한 문건을 양 전 대법원장에게 바로 보고했을 것"이라고 진술했다. '양승태 행정처'의 일부 간부와 심의관이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터져 양 전 대법원장이 벼랑 끝에 몰렸던 2017년 2 월, 함께 산행(山行)을 가서 차기 대법원장으로 누구를 추대할지 논의한 정황이 담긴 메모도 고스란히 검찰 손에 넘어갔다. 이번 사건에 연루된 몇몇 판사는 "과거 법원행정처의 잘못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범죄가 되는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동료 판사들의 진술과 그들이 검찰에 제출한 물증을 확인하고 나니 세상에 믿을 사람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양승태, 김명수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8/06/201908060022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