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우 논설위원
입력 2019.08.08 03:14
이사할 집 욕실 공사 맡겼더니… 모든 게 신기한 세계의 연속
망치로 세면기 한 번 쳐본 업자 "중국산 강화 플라스틱이네요"
한 치 오차 없는 수평과 수직 만들어 내는 육체노동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자로 재고 수평 맞추는 일의 정직함
전 주인이 집을 얼마나 험하게 썼는지 이사할 집 욕실 도기 일체를 바꾸고 도배를 새로 한 뒤 청소 업체를 부르기로 했다. 한 푼이라도 아껴 보려고 자재를 직접 사고 인터넷을 뒤져가며 공사 업체들을 찾았다. 점심시간에 을지로에 나가 변기와 세면기 구경을 했고, 퇴근 후엔 업체들 블로그에서 시공 후기를 읽었다. 인터넷에 인테리어 업자들이 모여 있는 카페가 있어 그곳에 우리 집 사진을 올리고 이렇게 저렇게 하고 싶은데 가능한지, 견적은 얼마나 될지 묻는 글을 올리면 밤새 답장 쪽지가 우수수 쌓이곤 했다. 욕실 공사 해주겠다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는데, 세면기가 특이하게 생겨 철거하기 쉽지 않다고 했다. 아파트 시공사가 자재비 줄이려고 중국에 주문 제작한 세면기일 것이라고 했다. 한 업자는 "그 세면기를 떼어내다가 타일이 같이 떨어지면 타일 공사도 해야 한다"고 했다.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어찌어찌 찾아낸 욕실업자는 익숙한 솜씨로 변기를 뜯어내더니 세면기를 철거하다가 혀를 내둘렀다. "저거 무슨 시멘트나 본드 같은 걸로 붙여놔서… 망치로 부숴야겠어요." 그는 대가리가 주먹만 한 망치로 세면대를 쾅 하고 내리쳤다. 망치가 튕겨 나왔고 세면기는 멀쩡했다. "이거 도기가 아니네. 강화 플라스틱인데요. 중국산." 망치로 한 번 쳐보고 산지(産地)와 재질을 맞히는 그는 욕실 공사만 40년 했지만 강화 플라스틱으로 만든 세면기는 처음 봤다고 했다. 싱크대 자재로 많이 쓰이는 인조 대리석을 강화 플라스틱으로 만드는데 돌보다 단단해 망치로는 부술 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그는 "그라인더로 갈아야지, 뭐" 하고 말했다. 그 얼굴에 '이거 일이 커지네' 하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동그란 강철 칼날이 빠르게 돌며 내는 마찰 굉음이 한참 들리더니 그가 나를 불렀다. 보안경과 특수 마스크를 쓴 그는 온몸에 허연 플라스틱 가루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필요 이상 욕실 선반을 잘라내야 했으며 그만큼 세면기와 선반 사이의 공간을 마감하는 실리콘 폭이 넓어지니 모양이 이상해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세면기는 손을 씻을 수 있는 설비라는 것 외에 아무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그저 "예, 예" 하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모든 작업이 끝났을 때 나는 아이처럼 감탄했다.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지저분하던 욕실에 새 도기와 샤워기가 들어서고 새 욕실장은 반짝반짝 빛났다. 모든 물건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수평과 수직을 이뤘으며 벽이나 바닥과의 공간은 자로 잰 듯 동일한 간격의 백시멘트와 실리콘으로 마감돼 있었다. 낡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들인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잘못을 바로잡아 올바르게 한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비로소 알게 된 느낌이었다. 육체노동이란 얼마나 정직한 일인가, 오로지 현장에서 쌓아 터득한 경험칙으로 문제를 정면 돌파하는 저력은 얼마나 힘이 센가 하고 새삼 탄복했다.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며 약속한 보수에 즐겁게 얼마를 더 얹어 드렸다.
우리가 문제 해결에 실패하는 것은 대개 머리를 너무 많이 쓰기 때문이다. 경험을 존중하고 전문가를 우대하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린다. 이사할 집을 손보며 만난 기술자들은 딱 필요한 만큼 머리를 썼고 대부분의 시간을 당면한 목표에 집중하느라 땀을 흘렸다. 머리 많이 쓰는 사람들은 그들의 일이 나사를 조이고 파이프를 연결하며 전선을 잇는 단순 노동이라고 쉽게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일의 순서를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상황에 따라 어떤 변수가 있고 문제가 발생하는지 훤히 꿰뚫어 보고 있다. 그것이 그들의 익숙하고 능란한 멋, 즉 노련미(老鍊味)다. 평생 머리 많이 쓰는 일을 하다가 은퇴한 이들 중 목수로 변신한 사람들을 종종 본다. 자로 재고 대패로 깎으며 수평 맞추는 일의 정직한 아름다움에 매료된 것이다.
이사 며칠 후 TV 채널을 돌리는데 홈쇼
핑에서 전동드릴 세트를 팔고 있었다. 여자 쇼호스트가 육중한 드릴로 콘크리트 벽을 쑥쑥 뚫어냈다. 카메라는 힘주느라 인상 쓰고 있을 그의 얼굴은 비추지 않고 몇 초 만에 벽에 구멍을 내는 드릴 끝만 보여줬다. 나는 분명히 그 드릴이 방송처럼 쓰기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10개월 무이자 할부로 드릴을 사고야 말았다. 좀 노련해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8/07/2019080703321.html
'일러스트=이철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상현의 디지털읽기] 아마존의 비밀병기… 600만 업체 대상 '무자비한' 평점 관리 (0) | 2019.08.13 |
---|---|
그래도 하지 못한 연애를 후회합니까 (0) | 2019.08.12 |
[김철중의 생로병사] 항암에 새 兵器… 낙천성·투지에 '평상심' 가세 (0) | 2019.08.06 |
"법원행정처가 나를 악용" 검찰 불려간 판사들의 배신 (0) | 2019.08.06 |
[팀 알퍼의 한국 일기] '기리'라 불리면 어때… 영국인들의 못말리는 '스페인 태양' 중독 (0) | 2019.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