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혜진 기자
입력 2017.09.23 03:02 | 수정 2017.09.24 15:03
만화 잘 그리고 아이돌 세밀모사 최고인 10代들 일컫는 은어
그림 한 컷 10만원에도 중·고생들 지갑 열어
부모들 잔소리도 못하고 속태우며 "어이없다"
"그놈의 존잘놈인지 뭔지, 애가 몇 년 동안 아껴 모은 용돈을 몽땅 내놓고 있더라고요. 정말이지 어이가 없었죠."
은행원 문희영(45)씨는 두 달 전 중학교 2학년 딸 손에 끌려 서울 양재동 한 플리마켓에 다녀온 사연을 털어놨다. 딸과 비슷한 또래 학생들이 모여 직접 그린 연필화, 손수 만든 마우스 패드, 안경 닦는 천, 유리 공예품, 장신구 같은 물건을 팔고 있었다. '대체 누가 이런 물건을 사는 거야'라고 속으로 중얼거릴 때, 딸이 지갑을 열어 현금 30여 만원을 꺼내더니 이렇게 말했다. "존잘님, 제가 그 그림 세 장 살게요." 문씨는 "딸이 '내가 평소 트위터에서 추종하던 10대 일러스트레이터'라고 했다. 걔가 그린 그림이 한 장 십만원이 넘는 것도, 그걸 내 딸이 덜컥 사는 것도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연예인 콘서트 티켓에 그 돈을 썼으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최근 10대 청소년 자녀를 키우는 부모 사이에선 '존잘님'이 은밀한 화제다. 이들은 연예인도 유명인도 아니다. 아이와 엇비슷한 나이의 중·고등학생인 경우가 많다. 만화를 빼어나게 잘 그리거나 아이돌 가수 모습을 세밀하게 모사(模寫)하거나, 팬픽(fanpic·팬이 스타를 주인공 삼아 쓰는 글)을 써서 이름난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글씨를 예쁘게 쓰거나 만화 캐릭터나 특정 연예인을 소재로 한 각종 공예품을 잘 만드는 경우에도 '존잘님' 대접을 받는다. 서울 압구정동 한 중학교에 다니는 이모(14)양은 "'정말 잘한다' '대단하다'라는 뜻으로 존잘님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내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실력을 보여주는 사람을 그렇게 불러요. 가령 저는 한 아이돌 그룹 팬인데, 이들 모습을 정말 잘 그리는 존잘님이 있으면 그분 그림을 열심히 모으는 거죠. 단순히 아이돌 사진을 수집하거나 앨범을 수집하는 것과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어요."
존잘님의 명성은 대개 트위터 같은 소셜미디어 팔로어 숫자로 가늠된다. 서울 원명초등학교 6학년 김모(12)양은 "일본 문화 오타쿠 커뮤니티나 아이돌 팬 카페에서 종종 오르내리는 존잘님은 보통 몇만명에서 몇십만명까지 팔로어를 자랑한다"고 했다. 이들을 추종하는 아이들은 이들이 만드는 각종 '상품'을 돈을 주고라도 손에 넣고 싶어 한다. "어떤 존잘님에게 나만을 위한 팬픽을 써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한 단락에 1만~1만5000원 정도 달라고 해서 그간 차곡
차곡 모아뒀던 세뱃돈을 다 털어 보내줬다"고 했다.
부모 입장에서는 이런 자녀를 이해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중학교 1학년 딸을 키우는 김모(48)씨는 "'그런 검증되지도 않은 네 또래 아이에게 용돈 바치지 말고 실력을 키워서 직접 그림을 그리거나 물건을 만들어보라'고 했지만 딸은 '존잘님 실력을 그렇게 얕잡아 보지 말라'고 대꾸하더라"고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9/22/201709220159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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