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배 뉴욕 FIT 교수·디자인
입력 2017.05.09 03:11
잔디 위를 질주하는 말 자태와 격식 갖춰 차려입은 여성 관객
경주마와 동행마의 스킨십 등 풍성한 볼거리로 인기 끌지만 페어플레이와 예의 가장 강조
미국적 가치 담은 스포츠 행사
경마에 특별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한 번쯤 들어 봤을 만한 '켄터키 더비(Kentucky Derby)'는 월드 시리즈, 수퍼볼과 함께 미국의 3대 스포츠 이벤트로 불린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의 높이보다 긴 관중석에서 16만 명이 '나의 켄터키 옛집(My Old Kentucky Home)'을 합창한다. 입장하는 말들은 깨끗하게 빗질이 되어 햇빛에 반짝인다. 기수들의 다채로운 의상과 타원형의 푸른 잔디를 완벽한 리듬으로 달리는 말들의 모습은 그 어느 스포츠의 장면보다 아름답다. 천둥이 몰아치는 것 같은 말발굽 소리, 사방으로 튀는 흙 파편들, 그 거칢 속에서 말을 섬세하게 다루는 기수들의 능력이 경이롭다. 말의 속도와 리듬에 맞추어 몰입하는 순간에는 '스포츠에서 가장 위대한 2분'이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되지 않음을 실감한다. '에덴의 동쪽' '분노의 포도' 등으로 잘 알려진 작가 존 스타인벡(Steinbeck)은 켄터키 더비를 "이것은 경주이고, 감동이며, 격동이자 폭발이다. 내가 경험한 가장 아름답고, 거칠며, 만족스러운 것이다"라고 표현했다.
존 스타인벡, 에덴의 동쪽, 분노의 포도
세계 도처에서 경마가 열리지만, 켄터키의 경마는 특별하다. 우선 켄터키주(州)는 말이 자라는 데 최적의 조건, 즉 석회암과 맑은 물, 칼슘이 많은 블루그라스가 충분하다. 이 때문에 지속적으로 최고의 명마를 생산한다. 도처에 구불구불한 언덕과 파란 잔디, 흰색 또는 검은색 울타리 안에서 말들이 노니는 풍경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경마장에 앉으면 보이는 검은 헛간, 나무와 잔디, 군데군데 심어놓은 꽃의 조경은 수려한 켄터키주의 경관을 그대로 연장해 놓은 것 같다. 경마장 분위기도 유럽이나, 아시아, 또는 미국의 다른 지역과 다르다. 켄터키주는 경마가 도박과 음주의 문화로 편향되는 부정적 인식을 깨뜨리기 위해서 백 년 이상 노력을 기울여왔다. 미국의 상류층 여성들에게 '경마장으로의 피크닉'을 권유하면서 고품격 경마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봄과 가을의 좋은 날씨에 버번 위스키로 만든 '민트 줄립(Mint Julip)' 칵테일을 마시며 말들의 힘찬 질주를 보는 것이 오래전부터 하나의 축제가 됐다.
여기서 큰 볼거리 중 하나는 여성들의 의상이다. 켄터키 사람들은 교회에 갈 때보다 경마장에 갈 때 옷을 더 잘 차려입는다. 1960년대부터 세계적으로 여성의 패션에서 모자가 사라지면서 경마는 여성들이 모자를 쓰는 특별한 날이 됐다. 일상생활에서 입어보기 힘든 튀는 스타일을 야외 행사에서 마음껏 자랑하는 것이다. 모자, 드레스, 구두와 핸드백이 완벽하게 코디네이션 된 여성 패션의 정수를 감상할 수 있다. 유럽과 달리 미국에서 이렇게 많은 여성이 이렇게 멋진 옷과 모자를 쓰고 모이는 경우를 보기는 아주 드물다.
켄터키의 경마장에서는 예의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켄터키는 미국의 남부다. '서던 호스피탤러티(Southern Hospitality)'라는 표현이 있듯이 남부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다. 하지만 동시에 예의를 무척 중시한다. 이들은 아직도 과거 남부의 영화를 기억하고, 전통과 격식을 지키며 산다. 여기서 경마를 즐기려면 이런 문화를 이해하는 편이 좋다. 안내원들은 관중 하나하나를 기억하고 모두에게 즐거운 시간과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한다. 하지만 여기서 무례한 행동을 한다면 경마장에서 나가달라고 아주 예의 바르게 부탁받을 것이다.
눈여겨볼 장면 중 하나는 경주마가 입장할 때 바로 곁에 붙어서 동행하는 말의 모습이다. 에스코트 호스(escort horse), 또는 컴포트 호스(comfort horse) 등으로 불리는데, 관중의 함성, 장내 분위기 등으로부터 경주 전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 경주마를 위한 배려다. 이 동행마는 경주마와 같이 자라온 말들로 순하고 성격이 좋으며, 평소에 경주마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이들은 입장부터 출발 게이트에 서기 전까지 경주마를 편하게 해주고 긴장을 풀어 주는 역할을 한다. 동행마는 걸어가는 동안 끊임없이 경주마와 얼굴을 비비면서 애정 표현을 한다. 애틋한 사랑이 느껴진다. 이는 미국 경마에만 있는 전통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말들의 경주 못지않게 관중이 좋아하는 순간이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켄터키의 경마는 관람할 가치가 있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사랑을 추억하고 또 생각하게 한다. 지금 우리는 누구를 이렇게 지극히 사랑하고 또 사랑을 받고 있는가?
민트 쥴립, 컴포트 호스
이 무대에 서기 위한 여정은 쉽지 않다. 2분간의 경주를 위해서 오랜 준비가 필요하다. 경마는 수비가 있으면 공격이 있는 스포츠가 아니다. 다음 기회는 없다. 완전히 이기거나 지거나 둘 중 하나다. 켄터키의 기수들은 경주가 끝나고 돌아오면서 심판들에게 인사를 한다. 페어플레이에 대한 인증과 심판의 수고에 대한 감사다. 승부를 겨루는 스포츠를 넘어 삶의 방식이 된 켄터키 경마. 여기에는 역사와 전통, 스타일과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존경, 예의가 담겨 있다. 그것이 켄터키 경마를 명품 경마로 만드는 본질이다.
켄터키 더비 모습. /AP 뉴시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08/201705080227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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