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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남자 태영호

런던에서 힘들게 구해 보낸 말 안장… 김정은은 白馬에 그 안장을 얹었을까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입력 2019.10.26 03:00


[아무튼, 주말-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무중계 논란을 빚은 남북 축구 경기가 끝난 다음 날(16일), 뜬금없이 김정은의 '백마 이벤트'가 펼쳐졌다. 북한 언론은 남북 축구는 일절 보도하지 않고 김정은의 백두산 백마 등정만 보도했다. 한국 사람들 반응이 궁금해 네티즌 댓글을 살펴봤다. "백마가 불쌍하다" "130㎏ 되는 사람이 말을 타는 것은 명백히 동물 학대" 등 조롱 섞인 반응이 많았다. 왜 하필 김정은은 백마를 타고 백두산에 갔을까. 북한에서 '백두산''백마'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백두 혈통' '주체의 혁명 위업'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최고 상징이다. 김씨 일가는 스스로 '백두 혈통' '백두의 축지법을 쓰는 명장'이라고 선전하고, 말을 잘 타는 '명장' 이미지를 특히 부각시킨다. 북한 전역엔 김씨 일가가 말을 타는 모습이 담긴 대형 벽화와 동상이 많다. 2011년 김정일이 갑자기 사망했을 때 김정은이 아버지를 위해 제일 먼저 세운 동상도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기마(騎馬) 동상이었다. 이를 본 외국인들은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기마 초상과 닮았다고 했다.

백두산까지 말은 어떻게 가져갔을까. 아마 평양에서 대형 수송기로 백두산으로 말을 운송한 뒤 대기시켜 놨다가 첫눈이 내린 날에 맞춰 백두산에 오른 것 같다. 여러 사람이 내게 저렇게 잘생긴 말을 어디서 가져온 건지 물어봤지만 나도 잘 모르겠다. 원래 김정은이 타던 말은 회색 말이었는데 이번엔 백마로 바뀌어 있었다. 한국의 한 말(馬) 전문가는 이 말이 러시아 명마(名馬)로 알려진 '오를로프 트로터(Orlov Trotter)' 품종이라고 설명했다. 18세기 러시아 알렉시스 오를로프 백작이 러시아의 심한 추위에 잘 견딜 수 있게 '스메탄카'라는 이름의 아랍종과 덴마크산 암말을 교배해 만들어냈다고 한다. 실제로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김정일의 애마(愛馬) 취향을 알고 좋은 러시아말을 '선물'로 보낸 적이 있었다.

직접 좋은 말을 들여가기도 한다. 내가 영국에서 북한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2006년, '3층 서기실'로부터 영국에서 좋은 종의 말을 수입할 수 있는지 알아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며칠 동안 목장을 돌아다녔지만 대북 제재 때문에 말을 들여갈 수는 없었다.

2007년 런던에서 처음으로 북한 만수대창작사와 영국의 북한 미술품 수집가 데이비드 히더가 공동으로 북한 미술 전시회를 열었다. 런던 중심 트래펄가 광장 옆 갤러리에서 인공기를 내걸고 진행한 미술 전시회였다. 관람객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작품도 꽤 많이 팔렸다. 이런 큰 이벤트로 돈을 좀 벌면 대사관과 주무 부처에선 김정일에게 '정성품'을 올리는 것이 관행이다. 김씨 일가가 아랫사람들에게 하사하는 것은 '선물'이라고 하고, 밑으로부터 최고 지도자에게 올리는 진상품은 '정성품'이라고 표현한다. 대사관과 만수대창작사 대표단은 말 안장을 정성품으로 올리기로 했다. 승마 상식이 없는 나로서는 어떤 말 안장이 좋은 것인지 알 수가 없어 히더에게 부탁해 영국에서 제일 좋은 말 안장을 구했다. 그러면서도 김정일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정성품 대부분이 김정일 곁에 가보지도 못하고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에 전시용으로 보관되기 때문이다. 다행히 얼마 후 평양으로부터 '장군님께서 대단히 만족하셨다'는 전보가 왔다.

그 후 김정일이 말을 탄 사진이나 기록 영화를 보니 우리가 보낸 말 안장을 쓰고 있었다. 김정일이 사망한 후 김정은이 회색 말을 탄 사진이 크 게 공개됐을 때도 아버지가 사용하던 영국산 말 안장을 그대로 이용하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같은 말 안장인지 궁금해 유심히 살펴봤지만 치장을 요란하게 해 말 안장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남북 축구 경기 소식은 '파발'보다 늦게 평양에서 서울로 보내면서 백마 쇼는 '룡마를 타고 새로운 신화를 창조한 이벤트'로 떠드는 나라는 21세기에 북한 말고는 없을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0/25/201910250193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