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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남자 태영호

학생·군인 무조건 머리 깎는 北 삭발은 항의 아닌 복종의 의미

태영호 전 북한 외교관
입력 2019.09.28 03:00


[아무튼, 주말- 평양남자 태영호의 서울 탐구생활]



최근 조국 장관의 사퇴를 요구하며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릴레이 삭발을 했다. 지지와 조롱이 오가는 가운데 북한이 비난에 가세하면서 한반도 전역의 화젯거리가 됐다. 그런데 북한 주민들 눈에는 삭발이 결기나 항의의 뜻으로 읽히지 않는다. 북한에서 삭발은 당국의 요구에 복종하겠다는 뜻을 보여주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초·중·고 남학생들은 의무적으로 머리를 짧게 깎아야 한다. 완전한 삭발은 아니고 머리 길이 1㎝ 정도로 짧게 자른다. '상고머리'라고 한다. 한국에서는 이런 머리 스타일을 '스포츠 머리'라고 한다고 들었다. 한국에도 상고머리란 단어를 쓰는데 북한보다는 좀 긴 스타일을 의미한다고 했다.

일제 잔재라고도 하지만, 남학생들의 이런 머리 스타일은 위생적인 목적이 더 크다. 일반 가정에 목욕 시설이 제대로 안 갖춰져 있어 머리에 이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머리를 짧게 자르게 한다. 군인도 무조건 삭발해야 한다. 군대 목욕 시설이 제대로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북한 군인이 남한 군인보다 키가 작아 육탄전을 할 경우 남한 군인에게 머리채를 잡히지 않기 위해 삭발을 한다는 설도 있다. 군대에서 5~6년 정도 복무해 상급자가 되면 머리를 길러 멋을 낸다. 제대할 때 삭발을 하고 고향으로 가는 군인은 '머저리 군인'으로 취급받는다.


북한 헤어스타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김정은이다. 북한 지도자가 된 직후 그의 특이한 헤어스타일이 큰 화제가 됐다. 미국에 있는 국제이발사협회(International Barber Association)는 김정은의 헤어스타일이 "중력을 거스른 사다리꼴(trapezoid) 모양"이라고 묘사했다. 외신에선 '슬릭백 언더컷(slick back undercut)' '투블록컷' '포마드컷' 등으로 부르며 관심을 가졌다.

덕분(?)에 내가 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은 사건이 있었다. 2014년 4월 영국에서 북한 대사관 공사로 근무했을 때였다. 런던의 한 미용실 쇼윈도에 김정은의 사진과 함께 'Bad Hair Day?(머리 모양이 마음에 안 드는 날인가요?) 남성 고객은 15% 할인!"이라는 광고가 내걸렸다. 미용실 주인이 김정은의 머리 스타일을 풍자하면서 호객 광고를 한 것이었다. 영국에서는 여왕이나 총리 사진까지 광고용으로 사용하지만 북한 외교관 입장에선 묵과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가 평양에서 먼저 알게 되면 목이 날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미용실 주인을 찾아가 '당신이 내건 저 판촉용 사진에 나오시는 분이 누구인 줄 아는가. 조선의 최고영도자 김정은 원수님이시다. 조선은 최고 존엄을 건드리면 전쟁도 불사하는 나라다. 당신이 사진을 당장 내리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위협해 즉시 떼게 했다. 그런데 주인이 테러 위협을 느낀 모양인지 이 사실을 경찰에 신고하고 언론에도 공개했다. 결국 이 사건은 한국 등 전 세계 언론에 보도됐다. 북한 당국은 모든 해외공관에 "영국 주재 조선대사관 성원들의 충성심을 따라 배우라"는 지시를 내려 보냈다.

북한에서는 헤어스타일이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집단의 정신문화를 보여주는 문제라고 본다. 특정 헤어스타일을 강요하기도 한다. 김정은이 지도자가 된 후 당국에선 김정은의 헤어스타일을 모방한 속칭 '패기(覇氣) 머리'를 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패기 머리 란 옆과 뒷머리를 짧게 올려 자르고 앞과 윗머리만 길게 남긴 스타일을 말한다. 당국이 허용하는 헤어스타일과 다르게 이상한 스타일을 해서 단속된 사람의 얼굴과 실명, 직장까지 밝혀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TV 프로그램도 있다. 머리 모양마저 국가에서 강요하는 것은 비정상이다. 앞으로 북한에서도 자기 취향에 맞게 헤어스타일을 선택하고 염색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9/27/201909270201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