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절주절

[일사일언] 혼자인 게 두려워서

조선일보 이원하 시인 / 입력 2020.06.05 03:00

이원하 시인

모든 문제는 자신이 혼자라고 착각하는 순간에 발생한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들른 경유지 러시아 공항에서 게이트 스크린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말이다. 아무리 바라보고 있어도 내가 찾아가야 하는 게이트 번호만 보이지 않았다. 지나가던 공항 직원에게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자신이 영어를 할 줄 모른다는 사실뿐이었다. 혼자서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주변에 한국인도 없었다. 다른 무리의 여행자들은 잘도 게이트를 향해 사라질 뿐이었다. 쉽게 긴장하지 않는 체질인데 긴장감이 들기 시작할 때쯤, 한 사람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방콕으로 향하는 티켓을 빳빳이 펼쳐보이며 자신이 향해야 하는 게이트 번호만 스크린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와 같은 상황이었다.

혼자였던 우리는 둘이 되어 차분한 마음으로 다시 게이트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우리가 향해야 하는 게이트 번호가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코앞에 아주 선명하고 크게 적혀 있었던 것. 머쓱해진 우리는 웃으며 각자의 게이트로 향했다.

도대체 왜 혼자였을 땐 게이트 번호가 보이지 않았던 걸까. 가만 생각해보면 살면서 겪은 문제의 대부분은 내가 혼자라고 착각하는 순간에 발생하곤 했다. 혼자인 게 두려워서 워킹 홀리데이 기회를 날려 먹은 적 있었다. 혼자인 게 두려워서 무인도에서 지내볼 기회도 날려 먹은 적 있었다. 혼자인 게 두려워서 편안한 고수익 아르바이트 자리도 그만둬버린 적 있었다.

하지만 혼자라는 두려움을 떨쳐내고 제주에 혼자 정착하자마자 나는 시인이 될 수 있었다. 20대 때 '혼자'라는 단어가 주는 두려움 때문에 인생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쉽다. 인생은 혼자라는 망상과 인연을 쌓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저 온전히 내가 '나'와 함께인 시간을 즐겨야 한다. 즐길 때 비로소 아무 문제도 발생하지 않는다.

 

출처: 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05/202006050019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