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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박성민의 정치 포커스] 세계화 올라탄 30년 전처럼… 尹, ‘다시 대한민국’ 이룰까

박성민 정치컨설턴트
입력 2022.04.22 03:00

일러스트=이철원

韓, 탈냉전 시대 기회 잡아 번영하는 동안 러는 蘇 회귀, 中은 독재화, 北은 핵 가져
공산국가 향한 ‘햇볕정책’ 다 실패로 판명… 대전환 시대에 우리 정치는 ‘막장 드라마’
민주당, 이성 잃고 민주주의 자해극 벌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중에 북한이 미사일 시위와 핵 위협을 했다. 지난 30년 공산국가를 향한 ‘햇볕 정책’은 모두 실패했다. 러시아는 여전히 소비에트 제국 위상을 그리워하고, 중국은 부유해졌지만 민주화로 이행하지 않았고, 북한은 핵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미국·유럽연합(EU)은 ‘그들이 변할 것’이라고 오판했다.

푸틴과 시진핑의 지지 기반은 놀랍게도 ‘MZ세대’다.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들이 ‘쇼비니즘’에 사로잡힌 이유는 뭘까. 스위스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김정은에게 걸었던 기대가 헛된 것처럼 이들에게 걸었던 변화의 기대도 허탈하다.

냉전 끝 무렵을 또렷이 기억한다. 고르바초프는 1988년 “아무도 진리를 독점할 수 없으며 사회주의 발전의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신(新)베오그라드 선언’을 발표한다. 이로써 “사회주의 진영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는 개별 국가의 주권은 제한될 수 있다”는 ‘브레즈네프 독트린’은 폐기됐다. ‘제한 주권론’이라 부른 브레즈네프 독트린은 체코 ‘프라하의 봄’을 진압한 명분이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1년 소련이 해체됐다. 우리는 역사적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990년 한·소 수교, 1991년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1992년 한·중 수교가 숨 가쁘게 이어졌다. 누구나 냉전이 끝난 건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탈냉전과 함께 오고 있었던 더 큰 변화를 눈치 챈 사람은 많지 않았다.

‘Globalization’은 처음에는 ‘지구촌화’라고 번역되었다. 그만큼 ‘세계화’에 순진했다. 유명한 교수가 “세계화 그거 별거 아닙니다. 국제화를 좀 쎄게화하는 것입니다”라고 설명하던 장면을 잊을 수 없다. 훗날 토머스 프리드먼이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세계화의 의미를 설명해 줄 때까지는 무서운 노림을 알아챈 사람이 몇 안 됐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구호 ‘서울은 세계로, 세계는 서울로’는 국제화와 세계화를 잘 상징한다. ‘서울은 세계로’가 국제화라면 ‘세계는 서울로’가 세계화다. 국제화가 나가는 것이라면 세계화는 들어오는 것, 즉 ‘개방’이다. 쌀·금융·법률 시장을 여는 것이다. 그땐 몰랐다.

세계화는 미국이 냉전 시대에 빌려준 ‘빚’ 받으러 온 것이다. 그 당시 세계화를 추진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었다. 김영삼 정부는 1994년 호기롭게 ‘세계화 추진 위원회’를 출범시켰는데, 분위기를 제대로 파악했다면 ‘세계화 대책 위원회’를 만들어야 했다.

세계화(렉서스)에 올라탈 것인가, 아니면 정체성(올리브나무)을 지킬 것인가. 우리는 세계화를 택했다. 옳은 선택이었다. 한국은 세계화 최대 수혜자다. 세계화 탓에 양극화가 심해진 것도 사실이지만 세계화 덕에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것도 사실이다.

1990년대는 ‘리엔지니어링’ ‘리스트럭처링’ ‘다운사이징’ ‘아웃소싱’ 등 새로운 경영 용어가 쏟아지던 시대였다. 세계는 빠른 속도로 묶이고 있었다. 세계는 평평해졌지만 평등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승자로 보인 나라조차도 안으로는 양극화와 일자리 소멸이라는 골병이 들어가고 있었다. 세계화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세계화를 선도했던 미국과 영국이 먼저 발을 뺐다. 2016년 영국은 ‘브렉시트’를 결정했고, 트럼프는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중국을 상대로 패권 전쟁을 선포했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영국 모두 ‘찬란한’ 제국의 위상을 되찾고 싶었다. ‘소박한’ 중산층 삶을 잃어버린 대중은 분노했다. 이들의 분노와 증오를 숙주 삼아 ‘쇼비니즘’과 ‘포퓰리즘’이 확산했다.

제국들이 렉서스(세계화)를 버리고 올리브나무(정체성)로 돌아가자 하나로 묶였던 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글로벌 공급 체인’이 곳곳에서 끊어졌다. 얼마 전까지 인터넷·플랫폼·AI·블록체인 같은 기술이 세상을 지배하는 줄 알았는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식량·에너지·원자재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중이다. “맥도널드가 진출한 나라 사이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토머스 프리드먼 가설도 깨졌다.

이 새로운 흐름을 ‘탈세계화’로 부를지 아니면 ‘블록화’로 부를지는 모르겠으나, 세계화 덕에 선진국이 된 우리로서는 큰 위기다. 30년 전처럼 잘 대응할 수 있을까. 지난 30년간 우리는 경제 정책과 안보 정책을 놓고 큰 논쟁이 있었다. 보수는 ‘더 큰 대한민국’(성장), 진보는 ‘더 따뜻한 대한민국’(분배)을 앞세웠다. 진보는 “평화가 경제”라고 주장했고, 보수는 “경제가 평화”라고 맞받았다. 결과적으로 진보는 (북한에 대해) 순진했고 보수는 (약자를 돌보는 데) 게을렀다.

돌이켜보면 냉전이 끝나고 세계화가 시작되던 때 우리는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1987 체제’로 국민의 에너지를 하나로 묶을 수 있었고, 담대한 ‘북방 정책’과 호기로운 ‘세계화 추진 위원회’를 결단할 지도자도 있었다.

역대 정부 모두 국제 정치와 글로벌 산업 흐름 속에서 시대적 소임을 그런대로 잘 해냈다. 대통령이 국익을 위해 기꺼이 ‘지지자에게 욕먹을 용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난 10년은 극단적 진영 싸움 때문에 ‘비토크라시(vetocracy·상대 정책, 주장에 무조건 거부부터 하는 파당 정치)’ 늪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특히 문재인 정부 5년은 최악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지자에게 욕먹을 용기’가 없었다. 그가 ‘정치 훌리건’의 난장을 방치 내지 방조했기 때문에 민주주의, 법치주의, 공론, 엘리트 관료 시스템 모두 망가졌다. 문재인 대통령과 민주당은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처럼) 검찰을 악마화한 막장 드라마를 5년 내내 찍고 있다. 드라마가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다. 민주당이 이성을 잃고 자기들이 쟁취한 ‘민주주의’를 자해하고 있다.

‘다시, 대한민국!’을 내건 윤석열 정부가 30년 만에 다시 맞는 역사적 대전환 속에서, 30년 전 보수 정권이 그랬던 것처럼 대한민국을 다시 한번 도약시킬 수 있을까.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2/04/22/IFAPCNDGB5B5DPZ35UMBK3AZ4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