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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박성희의 커피하우스] ‘거짓의 수도꼭지’ 잠그기만 해도 살 만한 사회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입력 2022.04.29 03:00

일러스트=이철원

러시아 관영 매체는 ‘가짜 뉴스’ 퍼뜨리는 선전기관
딥페이크 영상·댓글 조작하며 다른 나라 여론 왜곡
文정권 임기 말 공영방송 지배구조 바꾸는 입법 진행중
거짓·편파 정보가 수도꼭지 틀면 나오는 구조 만들려해
언론이 거짓말만 걸러내도 살 만한 사회 될 수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며 내세운 명분은 돈바스 지역 러시아인을 보호하고 우크라이나를 네오나치로부터 구한다는 것이었다. 무차별 폭격과 학살로 점철된 전쟁 양태를 보면 애초에 누군가를 ‘보호하고 구한다’는 건 당치 않은 거짓이었다. 시작부터 거짓말이었던 러시아는 그 후에도 거짓말로 일관했다. 피투성이가 된 우크라이나 민간인을 ‘포도 주스’를 이용한 배우들의 연기라고 역선전하거나, 소위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해 젤렌스키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국민에게 항복하라는 연설을 하는 영상을 조작해 유포하는 식이다.

러시아 정부가 쏟아내는 거짓 정보(misinformation)의 양과 종류가 워낙 방대해 매일 모니터링하기도 벅찰 지경이다. 이런 러시아의 프로파간다 모델을 미국의 싱크탱크인 랜드연구소는 ‘거짓의 소방 호스’라고 불렀다. 엄청난 양의 거짓 정보를 수많은 채널을 통해 재빨리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쏟아낸다는 뜻이다. 러시아의 관영 매체는 언론이라기보다 거대한 선전 기관이다. 이들은 막대한 예산을 들여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에 수천 개의 가짜 계정을 관리하고, 우리 식의 ‘알바’에 해당하는 댓글족을 2교대로 24시간 가동시킨다고 한다. 이들의 할당량은 매일 200자 이상의 댓글 135개 이상을 다는 것이라고 보고서는 전한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내러티브는 대략 서구 사회가 전쟁을 촉발했다고 비판하며 러시아의 침략을 정당화하고, 미국내 인종 및 계층 갈등을 조장하고 반미 국가들의 반미 감정을 부추기는 내용이다. 이는 서방 세계가 지지하는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대통령의 ‘용감한 지도자’ 내러티브에 밀리는 느낌이지만, 정보가 막힌 러시아나 중국 사람들은 잘 모를 것이다. 언론의 자유가 없는 러시아나 중국은 언론자유국의 자유를 역으로 이용해 자신들의 입장을 ‘숨겨진 진실’이나 ‘다른 견해’로 둔갑시켜 전 세계에 전파하기도 한다.

요즘 전쟁은 총알과 미사일로만 하지 않는다. 비정규전과 사이버 전쟁, 여기에 우주 전쟁까지 가세한 혼성 전쟁(hybrid war)의 양상으로 진화한 지 오래다. 평화 시에도 ‘가짜 뉴스’를 무기 삼아 남의 나라 여론을 좌지우지하고 선거에도 관여한다. 어딘가 낯익은 장면 같지 않은가?

정말 상상하기 싫지만, 누군가가 우리나라에 ‘거짓의 소방 호스’로 가짜 뉴스를 대량 살포한다면, 또 AI를 이용한 딥페이크 영상으로 사람들의 판단력을 교란시키거나, 가짜 인터넷 계정을 만들어 댓글로 작정을 하고 여론 조작에 나선다면, 우리 사회는 과연 온전하게 작동할 수 있을까? 전쟁에 준하는 혼란기나 심지어 평화 시에도 우리의 말길은 참말과 거짓말을 가려낼 수 있는 정화 능력이 있는가?

혼탁하고 기울어진 공론장을 살얼음 걷듯 살아온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위의 물음에 대한 나의 답은 ‘아직 아니오’다. 사실 확인의 의무가 있는 언론이 ‘아니면 말고’식의 추론과 미검증 보도를 쏟아내고, 그런 보도가 정치권의 이해와 맞물려 확대 재생산되며, 그렇게 왜곡된 정보를 시민사회가 튕겨내지 못하는 한, 우리 사회는 거짓과 기만의 악순환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런 말길 위에서 무슨 민주주의를 하며, 무슨 공정이 가능하며 무슨 상식이 통할 것인가.

소셜미디어와 아마추어 저널리즘이 총 동원되는 러시아의 ‘거짓말 소방 호스’는 사람들이 첫 정보를 믿는 경향이 있다는 ‘진실의 환각 효과’에 근거해 엄청난 양의 정보를 반복적으로 쏟아낸다. 사실 확인 절차가 필요 없으니 시간과 노력도 들지 않는다. 이런 거짓 정보의 소나기에 대항하려면 일단 비옷을 입고(옷이 젖지 않도록)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보고서는 조언한다. 영국의 방송심의기관인 오프콤(Ofcom)이 왜곡 보도를 이유로 러시아의 다국어 매체(RT)를 규제한 것이 한 예가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밖에서 오는 거짓 정보는 막으면 되지만, 우리 사회 안에서 솟아 나오는 허위정보는 어디를 어떻게 막아야 하나.

‘검수완박’의 굉음 때문에 잘 들리지 않지만 지금 국회에서는 공영방송의 지배구조를 바꾸려는 입법안이 문재인 대통령 임기 내 통과를 목표로 진행 중이다. 공영방송을 정상화하고 싶었으면 진즉에 임기 초부터 할 일이지 왜 이제야 속도를 내는지 모를 일이다. 지난해 ‘가짜 뉴스’를 처벌하겠다는 ‘언론중재법개정안’을 민주당 단독으로 발의해 통과시키려고 하더니, 이제는 공영방송에 25인의 운영위원회를 두자는 복잡한 안을 들고 나왔다.

가짜 뉴스 처벌도 좋고 지배구조 개선도 좋지만, 문제는 ‘누가’ 가짜 뉴스를 판별하며, ‘누가’ 운영위원을 추천하느냐이다. 방송의 공영성을 의회가 논의한다는 건 모양상 그럴싸해 보이지만, 불행히도 우리 의회는 그만한 신망도, 실력도 없다. 어떤 운영위원회가 나와도 정치적 동기가 숨어있는 한 방송의 공영성은 산으로 갈 것이다. 교통방송도 마치 독립된 것 같은 지배구조를 표방하고 있지만 김어준의 편파 방송 하나 시정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핵심은 그래서 언론과 방송이 의도적인 허위 보도를 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느냐, 그래서 세상의 말길이 조금 맑아질 수 있느냐이다.

오래전부터 정치권의 단골 메뉴인 언론 개혁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거짓 편파 왜곡 정보가 수도꼭지 틀면 나오듯 하는 하부 구조를 점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세상에 아무리 정직한 사람들이 있고 좋은 정책이 있어도, 그걸 전달하는 말길이 왜곡되어 있다면 소용이 없다. 언론은 거짓말을 걸러내고 참말을 전달하기만 해도 된다. 거짓말이 없는 세상이면 좋겠지만, 적어도 걸러지기만 해도 그럭저럭 살 만한 사회가 될 수 있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2/04/29/2QKZKFGGZBHKDHCRRAP3I6Y45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