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러스트=이철원

[자작나무 숲] ‘2년 후, 우리 결혼하자’

김진영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입력 2022.07.05 03:00

일러스트=이철원

중학교 자퇴 후 공장 등 전전한 러 시인 브로드스키의 서정시 후렴구
세상이 아무리 나빠져도 사랑은 굴복하지 않는다는 고집스러운 다짐
소련 체제서 ‘사회의 기생충’ 죄명으로 추방된 후 1987년 노벨문학상

이오시프 브로드스키(Iosif Brodsky·1940~1996). 198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이 시인 이야기를 꼭 한번 하고 싶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유대계 러시아인으로, 중학교 자퇴 후 공장, 시체 보관소, 선박 보일러실, 지질 탐사 현장을 전전하며 시를 썼다. 대학 문턱에도 못 가봤지만, 혁명 작가 막심 고리키 표현대로라면, 그에겐 길 위의 삶이 곧 ‘대학’이었다.

아니, 길 아래 삶이 곧 대학이었다고 봐야 옳다. 스탈린에 이어 흐루쇼프가 집권하면서 소련에 ‘해빙기’가 도래했다. 비공식으로나마 비틀스 음악이 들어오고, 서구 문학이 유통되고, 폭넓은 청바지와 장발이 유행한 시기다. 그러나 브로드스키가 속했던 언더그라운드 문화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원칙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져 언제건 체포와 유형의 빌미가 되었다. 당국이 표방한 ‘해빙’의 자유란 체제를 선전하고 합리화하는 장치였을 뿐, 억압과 탄압은 여전했으며, 누구도 내일의 안위를 예측하기 어려웠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는 사람이 많았다.

청년 브로드스키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사람이다. 세 번의 체포와 정신병원 감금, 북극 강제 노동형을 거쳐 영구 추방되었다. 시민권을 박탈당한 채 적절한 이별 의식도 없이 무작정 빈으로 가는 비행기에 실려진 시인의 여행 가방에는 타이프라이터와 보드카 두 병, 그리고 17세기 영국 시인 존 던(John Donne) 시집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돌아오지 못할 유배길을 함께했던 그 가방과 모자가 지금은 페테르부르크 아흐마토바 기념관에서 전시 중이다.

한 용감한 유대계 여인 덕분에 1964년의 브로드스키 재판 전모는 현장에서 기록되어 전 세계에 전파됐다. 죄명은 ‘사회의 기생충’. 요즘 우리 사회에서야 ‘기생충’도 함부로 대하면 안 될 듯한 분위기지만, 당시 소련에서 그 단어는 반(反)소비에트 ‘인민의 적’을 의미했다. 심문은 정해진 프레임에 따른 것이었다.

판사: 하는 일은?
피고: 시 쓰고 번역한다고 생각한다.

판사: 당신 생각은 중요치 않다. 직업이 무엇인가?
피고: 시인. 시인-번역가.

판사: 누가 당신을 시인이라고 인정했나? 누가 당신을 시인으로 분류하던가?
피고: 아무도. 누가 나를 인간으로 분류했을까?

시인이 되고자 무슨 교육을 받았냐는 질문에는 ‘그것은 교육 문제가 아니다. 신에게서 오는 것이다’라고 답했다. 그의 재판 노트를 읽는 것은 부조리극을 관람하는 일과도 같다. 삶 자체가 한 편의 연극일진대, 브로드스키는 패배 앞에서 승리를, 모멸 앞에서 존엄을 일관되게 연기해낸 뛰어난 배우였다. 어떤 순간에도 짓밟혀 쓰러짐 없이 솟아오르던 그의 힘은 다름 아닌 서정의 원동력, 즉 아름다움의 날갯짓이었다.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시인이 말하기를, 예술은 사회적 동물(인간)을 자율적 자아로 격상하며, 개인의 미적 경험은 그의 윤리적 선택을 방향 짓는다. 아름다움을 체험할수록, 그리하여 확고한 취향을 지니게 될수록, 도덕적으로 더 민감하고 사적으로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거다.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은 쉽게 오염되지 않고, 아름다움을 ‘추앙’하는 사람은 추함의 진흙탕에서 어떻게든 헤어 나오려 한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도스토옙스키 명제의 진의가 그것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논증 경로를 뒤집어 생각해보면, 자신의 위엄을 잃지 않는 것, 사회적 동물의 집단 본능과는 거리를 두는 것, 지금 여기 너머를 볼 줄 아는 것, 실존의 도구들(언어, 행동거지, 눈초리 같은)을 순화하여 존재의 순간순간을 덜 더럽히는 것, 뭐 그런 것이다.

소비에트 언더그라운드 시절 브로드스키는 ‘서정시’란 제목의 연애시를 썼다. ‘2년 후/ 아카시아는 말라 죽고,/ 주가는 떨어지겠지,/ 세금도 올라 있겠지./ 2년 후/ 방사능은 더 늘어날 거야./ […] / 2년 후/ 내 목은 부러지고,/ 팔도 부러지고,/ 얼굴도 박살 나 있겠지./ 2년 후/ 우리 결혼하자./ 2년 후./ 2년 후.’

왜 하필 2년 후인지는 나도 모른다. ‘2년 후, 우리 결혼하자.’ 당장 내일의 과제도, 그렇다고 먼 훗날의 막연한 꿈도 아닌 이 언약은 연인을 향한 프러포즈 이상의 자기 다짐이다. 외적 현실에 역행하는 내적 현실의 고집스러운 후렴구라 할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나빠져도(나빠질수록) 사랑은 굴복하지 않으며, 결국은 해피 엔딩의 대단원에 이를 것이다. 출구 없는 소련 사회 틈바귀에서 열아홉 살 젊은 시인이 그토록 아름다운 오기를 부리고 있었다. 오직 하나뿐인 사적 삶의 각본을 쓰며 어느새 세상 모든 험악한 각본을 밀어내고 있었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2/07/05/ON6MSVACBNFGFP6RJB2M24TXK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