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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한은형의 느낌의 세계] “직접 글로 써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한은형 소설가
입력 2023.06.15. 03:00

일러스트=이철원

머릿속에 다 있다고 생각하지만 글로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머릿속에만 있는 글은 글이 아닌 데다가, 직접 쓰지 않으면 글로 풀어지지 않는다. 나만이 아니라 어떤 글이든 써본 사람이라면 겪어본 일일 것이다. 직업적으로 글쓰기를 하거나 글쓰기에 기반한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라면 더 공감할지 모르겠다.

위의 문장을 나는 지하철에서 메모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도쿄 기담집에 실린 ‘날마다 이동하는 콩팥 모양의 돌’을 읽다가였다. 이 책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생각이 잘 정리되질 않아. 나는 책상 앞에서 손을 움직여 실제로 글을 쓰지 않으면 줄거리가 움직여주지를 않아.” 이렇게 말하는 남자의 이름은 준페이, 직업은 소설가다. 자기가 쓰고 있는 단편소설에 대해 연인에게 이야기하다 저런 말을 한다. 내가 쓰고 있는 소설이지만 아직 쓰지 않은 부분은 알 수 없다고.

나는 무척이나 공감했다. 얼마나 공감했으면 이번 칼럼에 쓰려고 했던 다른 이야기를 접고 ‘글쓰기’에 대해 쓰기로 했다. 이쪽이 더 매력적이거나, 최소한 진솔하게 다가왔기 때문일 것이다. 쓰려는 사람인 나에게 말이다. 요즘의 내가 준페이처럼 단편소설을 쓰는 중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손으로 쓰지 않으면 다음을 알 수 없다. 정말 그렇다.

이상한 일이다. 쓰는 사람은 나고, 나의 손가락이 쓰는 것인데, 나는 모른다. 손가락을 자판에 올려놓지 않으면 어떻게 이야기가 전개될지 알 수 없다. A안과 B안과 C안이 준비되어 있지만 막상 쓰기 시작하면 A와 B와 C 모두 맞는 방향이 아니라며, 나의 손은 나의 의식을 다른 쪽으로 이끈다. 맞는 방향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손으로 쓰지 않았다면 그쪽으로 가지 않았을 거라는 건 안다.

머릿속으로 하는 글쓰기를 섀도복싱(shadow-boxing) 같은 것으로 생각한 시절이 있었다. 상대편이 앞에 있다고 가정하고 공격과 방어, 풋워크를 연습하는 섀도복싱처럼 지금 허공에 잽을 날리고 있는 거라고. ‘머릿속에 다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글로 쓰지 않은’ 글을 글자로 옮기기만 하면 된다고. 쓰고 있지 않지만 쓰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기 싫었다는 걸.

나태해서는 아니다. 아직 글을 쓸 준비가 되지 않아서 그렇다. 머릿속으로 글을 쓴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달군다. 글을 시작하기가 어려울 때 자기가 썼던 글을 본다고 하는 분들도 계신데 나는 그런 과는 아니다. 내 글이 아닌 남들이 쓴 글을 본다. 불안과 신경증, 자기혐오를 드러내며 글을 쓰기까지 어려움에 대해 쓴 글을 보며 생각한다. 모두들 겪고 계시는군요.

쓰기의 고통을 주제로 쓰인 책에서 영화감독 전고운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글을 써야 하는 시간. 나라는 회사의 사장도 나, 직원도 나. 좋은 사장이 되어야 하고 좋은 직원도 되어야 한다. 직원이여, 이제 다시 천박해질 시간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일은 내일의 우아함이 그 천박함을 가려줄 테니.” 책의 제목은 직관적이기도 한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유선사, 2022). 나도 이 책의 한 챕터를 썼다.

출판사 대표 J가 ‘쓰고 싶다 쓰고 싶지 않다’에 대한 글을 써달라며 청탁한 메일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허락을 구하고 메일의 일부를 인용한다. “출판 시장에서 책은 점점 팔리지 않는다고 다들 말한다. 그러나 다양한 SNS를 통해 사람들은 점점 더 쓰고 싶어 하고, 지금도 쓰고 있다. 긴 글을 읽지 못하는 독자층은 늘어가지만, 그 독자들 역시 무언가를 잘 쓰고 싶어 하는 마음은 동일하다”며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아도 ‘쓴다’는 행위는 모든 직업에서 필요하다고 했다.

섀도복싱이 얼마나 복싱에 도움이 되는지 아는 바가 없지만 적어도 글쓰기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다. 섀도 라이팅과 라이팅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고. 섀도 라이팅(shadow-writing)이라는 말은 지금 내가 만든 말이지만 말이다. 내가 쓴 글의 제목은 ‘쓰는 사람이 되기까지’였다.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쓰는 사람이 될 시간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도쿄 기담집
전고운
쓰고싶다 쓰고싶지않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3/06/15/INSGQ2P4CZF5TIN4KFLSXANCV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