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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만물상] 청혼부터 힘든 한국

김태훈 논설위원
입력 2023.06.17. 03:08

일러스트=이철원

한 분이 얼마 전 서울 고급 호텔에 갔는데 옷을 격식 있게 차려입은 청년들이 너무 많아 놀랐다고 한다. 의아해서 알아보니 프러포즈(청혼)하는 청년들이었다. 이 식당이 청혼 ‘명소’라고 했다. 청혼 명소가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고 한다. 호텔 프러포즈가 유행하자 호텔들도 경쟁적으로 관련 상품을 내놓는다. 수백만원 하는 곳도 찾는 이가 많다. 서울의 인기 5성급 호텔엔 몇 년 전만 해도 월 2~3건이던 예약이 요즘엔 20~30건씩 밀려든다. 상당수가 청혼이라고 한다. 제대로 청혼도 없이 결혼해서 사는 중년 이상들에게는 유별나다고 느껴지는 풍경이다.

▶인스타그램에 ‘호텔 프러포즈’ 해시태그(#)를 치면 사진 수만 장이 뜬다. 남녀가 꽃과 촛불 장식, ‘나와 결혼해 줘’라고 쓴 풍선, 하트가 새겨진 케이크 앞에서 미소 짓는다. 소셜미디어 과시 문화가 이를 부채질한다는 분석도 있다. 한 남성은 “여자친구가 소셜미디어에 올릴 프러포즈를 받고 싶다고 해 무리해서 호텔 패키지를 샀다”고 한다.

▶아직 일부의 얘기이겠지만 외신까지 이에 주목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비싼 프러포즈가 그러지 않아도 결혼을 망설이는 한국 남성들을 더욱 위축시킨다”고 했다. 호텔에서 프러포즈 하느라 하룻밤에 4500달러(약 570만원)를 쓴 남성의 하소연도 소개했다. 호텔 프러포즈 때 주는 선물 부담도 크다고 한다. 여성이 “내 친구가 프러포즈 선물로 받은 명품”이라며 소셜미디어에 뜬 사진을 보여주면 남성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이런 프러포즈에 대한 견해는 남녀가 갈린다. 한 여론조사 업체가 조사했더니 ‘호텔 프러포즈를 받고 싶다’는 여성 응답은 40%를 넘었다. 그런데 같은 조사에서 남성 33%는 ‘돈 부담 때문에 프러포즈를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결혼 자금 부담도 큰데 수백만원 들여 프러포즈까지 해야 하느냐는 항변이다. 호텔 프러포즈를 원하는 여성을 탓할 수 없다는 견해도 있다. 부동산 폭등 이후 번듯한 집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할 수 없게 됐다. 프러포즈 호사는 그에 대한 보상 심리라는 것이다. ‘월급 아껴 집은 못 사도 호텔 프러포즈는 할 수 있다’는 광고 카피가 그런 심리를 파고든다.

▶미국 체조 스타 시몬 바일스가 지난해 초 프러포즈 받은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지붕에 천막을 친 야외였고, 화려한 꽃 장식도 없었지만 무릎 꿇고 청혼하는 남자 앞에서 행복한 표정으로 잇몸까지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비싸고 화려한 청혼보다 이런 웃음을 줄 수 있는 상대를 찾는 게 중요할 것이다.

시몬 바일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manmulsang/2023/06/17/5OTGXJCTCJFP3P7WDV24EUORF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