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현우 작가·前용접 근로자
입력 2023.09.21. 03:00
“내 자식한텐 이런 일 안 물려줘야지.” 공장과 노가다판을 전전하며 흔히 들어왔던 말이다. 스물다섯 무렵 같이 페인트칠하던 아저씨에게 저 말을 들었을 때 문득 내 주변 풍경이 눈에 띄었다. 전봇대 인근에서 땀에 절고 페인트로 범벅된 옷을 입은 채 쭈그려 앉은 우리. 그런 우리와 애써 눈 마주치지 않으려 빙 돌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 순간 ‘이런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다시 서른 살. 차축 만드는 회사에서 손가락 부러지는 산재를 당했던 아저씨에게 저 말을 들었다. “니도 결혼하면 얼라들 공부 열심히 시키라”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그때 ‘이런 일’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던 아저씨들의 심리를 좀 더 자세히 이해하게 됐다. 내 선배들. 5060 육체노동 종사자들은 성인이 되고 결혼하는 삶, 가장이 경제를 책임지는 삶을 당연하게 여겨왔다. 가장이 쓰러지는 순간 집안이 풍비박산 나는 현실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상이 얕잡아보는 노동, 까딱 실수하면 목숨을 잃는 노동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여당은 ‘이런 일’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9월 7일, 국민의힘에서 50인 미만 사업장 중대재해처벌법 2년 시행 유예를 추진했다. 그 명분으로 중소기업의 만성적인 인력난과 전문 인력 확보 및 비용 문제를 말하며, ‘50인 미만 사업장 85.9%가 법 적용 유예가 필요하다는 현장 여론’을 들이밀었다. 법을 지킬 여력이 없으니 미뤄주자는 얘기다. 본질을 벗어난 비겁한 논리다. 그럼 묻고 싶다. 2026년쯤 되면 어려운 기업이 사정 좋아져서 안전 관리 인력이 확충될 것 같은가? 2022년 산재 사망자 874명 중 707명이 50인 미만 사업장에서 죽었다. 80.9%의 사망자가 쏟아지는 일터에 법 적용을 미루자고 하는 말인 즉, 그동안 죽어 나갈 사람들의 목숨 값이 하찮다는 뜻 아닌가.
물론 여당의 인식과 별개로 ‘중대재해처벌법이 산재 사망 감소에 효과적인지’는 논쟁해 볼 여지가 있다. 법의 취지를 부정하려는 건 아니다. 분명 고용주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다. 실제로 대기업 사업장엔 안전 관리 인력이 늘어나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법만 만들어선 한계가 분명하다. 숱한 산재 기사들을 보면 위법 사항부터 따지고 든다. 그런데 정작 노동자들이 그 법의 존재를 모른다. 기업주들도 딱히 지킬 생각이 없다. 사람이 일하다 죽으면 그저 재수 없는 일 당했다고 생각하고 만다. 과장이 아니라 실제 대한민국 육체노동의 현실이다. 왜 이런 풍토가 만연하냐면, 현장 노동은 번거로운 절차를 생략하고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 ‘빠꼼이’ 취급받기 때문이다. 나 또한 서울에서 화이트칼라로 일하면서 자주 보고를 누락하고 단독 행동을 했었다. 그게 일 잘하는 사원의 덕목인 줄 알았다. 그러다 상사들한테 호되게 야단맞고 나서야 절차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절차 없는 현장은 무법지대다. 무법지대엔 더 빡빡한 법이 아니라 보안관이 필요하다. 고용주와 노동자가 안전 절차를 준수하도록 많은 인력이 도입되어야 한다. 하지만 중소기업은 위에 언급했듯 인력 확충이 어렵다. 결국 산재 사망은 기업과 국가가 같이 짊어져야 할 문제란 뜻이다. 한국은 고용노동부 소속의 산업안전보건 감독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2018년 438명에서 2022년 793명으로 배가량 늘렸지만 여전히 부족하다. 국제노동기구(ILO) 또한 한국의 감독관 수를 더 늘려야 한다고 권고했다. 법으로만 아옹다옹하지 말고 열악한 무법지대에 보안관을 투입하자.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3/09/21/SNPS7EAGAJANXCKPA4EIRRJ72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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