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원 논설위원
입력 2023.09.22. 20:53 업데이트 2023.09.22. 23:52
2016년 12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개표에 참여한 의원들과 의사국 직원들은 깜짝 놀랐다. 국회 표결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에 무효표가 7장 나온 것이다. 한글로 ‘기권’이라고 쓴 표, 찬성과 반대를 의미하는 ‘가부’를 동시에 쓴 표 등 다양했다. 탄핵 찬성을 의미하는 ‘가’ 위에 동그라미를 쳐서 ㉮로 표기하거나 점을 찍어 무효표가 된 것도 있었다. 학력이 높고 정치 전문가들인 의원들이 규정을 몰라서 무효표를 만들었을 리는 없다.
▶새누리당 송광호 의원의 2014년 체포 동의안이 부결될 때는 이례적인 기록이 세워졌다. 국회의원 223명이 표결에 참여했는데, 무효표가 무려 24명 나왔다. 10명 중 한 명꼴로 무효표를 던진 것이다. 야당 원내대표를 지낸 한 정치인은 “실수로 무효표를 만드는 국회의원은 한 명도 없다”고 단언한다. 전 국회 고위 관계자도 “프로 정치인들의 무효표는 전부 계산된 것”이라고 했다.
▶국회 의사국장은 표결 전에 투표용지의 ‘가·부’란에 ‘가·부·可·否’ 4개 이외의 문자나 기호를 표기하면 무효로 처리된다고 공지한다. 기표소 벽에도 같은 내용의 안내판이 붙어 있다. 그렇기에 국회의원들의 표결에서 무효표가 나오는 것은 나름 많은 고민 끝에 나온 모종의 의사표시라고 봐야 한다. 국회 관계자들은 아예 수기(手記) 무기명 표결을 할 때 국회의원들의 선택지를 찬·반·기권에 무효표를 더해 총 4가지로 보고 있다.
▶한 의원은 “백지를 내는 기권이 소극적인 의미의 저항이라면, 무효표는 자신이 표결해야 하는 상황 자체에 대한 불만을 적극 표출하는 것”이라고 했다. 어떤 의원들은 ‘가’ 대신 ‘개’를 써서 표결 자체를 희롱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반대를 뜻하는 ‘否’의 경우, ‘不'를 써서 무효가 되는 표는 거의 매번 나오는데, 이 역시 실수가 아니라는 관측이 나온다. 국회에선 기표소에 오래 머무는 의원들일수록 심경이 복잡해 무효표를 찍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21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체포 동의안 표결에도 ㉮로 표기된 표 등 4표가 국회법에 따라 무효가 됐다. 체포안에 찬성하고 싶지만, 민주당 소속 의원으로서의 부담감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한 의원들이 던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날 표결에선 지난 2월 같은 표결 때보다 무효가 7표 줄어들었다. 무효표가 줄어든 것은 민주당이 ‘이재명 사당’으로 바뀌는 데 대한 반감과 위기감이 야당 내에서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manmulsang/2023/09/22/EKGQC3656VCSHKTMECWOVSOFA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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