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러스트=이철원

누가 니코틴을 넣었나… 살인 혐의 아내 무죄

30대 女, 파기환송심서 혐의 벗어
권상은 기자
입력 2024.02.03. 03:00

그래픽=이철원


남편에게 니코틴 원액이 섞인 미숫가루 등을 먹여 살해했다는 혐의로 기소돼 징역 30년형을 받은 30대 여성이 파기환송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판만 2년 넘게 이어진 이른바 ‘화성 니코틴 살인 사건’의 결말이 무죄로 끝날 전망이다.

수원고법 형사1부(박선준·정현식·강영재 고법판사)는 2일 살인 혐의로 기소된 A(39)씨에게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검사가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살인 범행을 했다고 보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밝혔다.


법원 판결에 따르면, A씨는 2021년 5월 26일 오전 7시쯤 출근 전인 남편에게 미숫가루와 꿀, 우유를 섞은 음료와 햄버거를 줬다. 퇴근 후 오후 8시쯤 흰죽을 줬고, 이어 새벽 2시쯤 찬물 한 컵을 건넸다. 이 음식을 모두 먹었던 남편은 이튿날 아침 숨진 채 발견됐다.

사망 추정 시각은 새벽 3시쯤. 찬물을 마신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부검 결과 사인은 ‘급성 니코틴 중독’으로 나왔다. 남편의 위에선 흰죽과 물로 보이는 내용물, 많은 양의 니코틴이 발견됐다. 혈액에선 치사 농도의 니코틴(2.49~5.21mg/L)이 검출됐다.

미숫가루 음료를 마신 남편은 출근 후 A씨에게 전화를 걸어 “가슴이 쿡쿡 쑤시고 타는 것 같다”고 했다. 이날 밤 10시 30분쯤 가슴 통증을 느껴 응급실도 다녀왔다. 이때 A씨는 “꿀 유통기한이 2016년이었네?”라고 했다. 응급실에서도 꿀 유통기한 이야기만 했다고 한다. 경찰은 당시 A씨가 전자 담배를 피우려고 사 놓은 니코틴액을 압수했다.

경찰은 이런 정황을 근거로 살인 혐의를 적용해 A씨를 구속 기소했다. 다만 A씨가 음식물에 니코틴을 넣었다는 직접 증거는 못 찾았다. 유일한 목격자도 당시 여섯 살이던 아이뿐이었다. A씨는 자신의 외도와 경제적 어려움 등으로 남편이 자살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혐의를 부인했다.

1심에서는 니코틴 넣은 음식을 먹게 해 남편을 살해한 혐의가 모두 인정돼 징역 30년형이 선고됐다. 당시 재판부는 “주거지 안에서 일어나 목격자와 CCTV가 없는 이런 사건에서 범행을 부인한다면, 검사가 간접 사실만으로 공소 사실을 완벽하게 입증하기는 어렵다”며 “간접 증거가 개별적으로 증명력이 없지만, 종합적으로 고찰할 경우 증명력이 있다. 이 사건의 공소 사실은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증명됐다”고 했다.

2심은 조금 달랐다. 세 가지 음식 중 미숫가루와 흰죽은 유죄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응급실에 갔을 때 뽑은 피가 가장 직접적인 증거인데 이미 폐기됐고, 구토와 복통 증세가 니코틴 중독 때문임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고 했다. 식중독 때문일 수도 있다는 감정 의견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사망 직전 마신 찬물만 유죄로 인정했다.

대법원은 2심이 인정한 찬물 부분도 죄가 안된다고 판단했다. A씨가 찬물에 니코틴 원액을 탔다는 사실이 입증되지 않았다는 게 판결 요지였다. 또 다른 경위로 니코틴을 섭취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특히 A씨에게 압수한 니코틴과 남편 혈액에서 나온 니코틴의 농도 차이가 너무 커서 범행에 쓴 제품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이날 파기환송심도 대법원 판결 취지를 이어받았다. 재판부는 “범행 준비와 실행 과정, 동기 등에 대해 합리적 의문의 여지가 있고, 범죄 증명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재판 과정에서 변호인이 제출한 니코틴 용액(희석액)을 재판장과 수사 검사가 향을 맡아보고 시음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에게 압수한 니코틴으로는 범행에 사용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며 “니코틴은 혓바닥이 타는 통증을 유발하기 때문에 의식이 뚜렷한 피해자에게 들키지 않고 마시게 하는 것이 가능한지도 의문”이라고 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에게 오랜 기간 내연남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자살을 시도한 적 있고, 가정의 경제적 문제 등으로 불안정한 정서가 심화했을 가능성이 인정된다”고 했다. 자살 가능성을 열어둔 판단이었다.

선고 직후 A씨 측 변호사는 “처음부터 피고인을 범인으로 잘못 지정해서 수사 방향이 잘못됐다”며 “재판부가 설명했듯이 모든 범죄 사실 중 가장 흉포한 게 살인인데, 피고인은 뚜렷한 동기가 없다”고 말했다.

검찰은 원심과 파기환송심에서 일관되게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검찰은 판결문을 검토해 재상고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다.

원글: https://www.chosun.com/national/regional/2024/02/03/VGWJ5ZDPOVFTNF7ZKE5VBK4QP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