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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만물상] 신촌 “아, 옛날이여!”

김태훈 논설위원
입력 2024.02.04. 21:12 업데이트 2024.02.05. 01:29

일러스트=이철원


설악산 입구에 있는 설악동은 1990년대까지 전국에서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북적였다. 수학여행 1번지이자 신혼여행지로도 인기였다. 호텔과 콘도 등 숙박 업소가 80여 곳에 이르렀고 상가는 150개를 넘나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유령 마을’이다. 오랜 시간 방치된 숙박 업소는 폐가나 진배없고 문 닫은 상가는 간판 도색이 벗겨져 을씨년스럽다. 옛모습만 생각하고 오랜만에 찾아갔다가 사람 발길조차 끊긴 풍경에 놀란다고 한다.

▶설악동은 원래 놀거리를 포함해 6개 지구로 계획됐다가 숙박 위주의 3개 지구만 개발했다. 그래도 돈이 벌렸다. 그 돈이 눈을 가렸기 때문일까. 국민 소득 증가로 관광 패턴이 먹고 자고 보는 데서 즐기고 노는 방식으로 바뀌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스포츠와 레저·위락 시설을 넣기로 한 나머지 3개 지구를 개발했다면 급격한 유령화를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는 한탄이 뒤늦게 나오고 있다.

▶1970~1980년대 온천도 설악동 못지않게 인기였다. 그 시절 TV 드라마 ‘야, 곰례야!’엔 정자가 남편 마영달에게 “온천 한번 가자”고 조르는 장면이 나온다. 온천 가는 게 최고의 호사였던 시대상이 드라마에까지 반영된 것이다. 창녕의 부곡 하와이, 구례의 지리산 온천랜드, 충주의 수안보 온천에 연간 수백만명이 몰려갔다. 그랬던 곳들이 지금은 폐업과 무기한 휴업, 방문객 감소로 몸살을 앓는다.

▶명동·압구정동과 함께 서울의 3대 황금 상권으로 꼽히던 신촌이 깊은 침체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서 연세대 정문으로 이어지는 알짜 상권이었던 연세로조차 곳곳에 공실이다. 연대생 카페로 불리던 독수리다방조차 폐업과 재개업의 풍파를 겪었다. 카공족(카페에서 공부하는 학생)의 성지였던 민들레영토는 노래방으로 바뀌었다. 스타벅스와 크리스피도넛 등이 국내 1호점을 냈던 유행의 전진기지라는 명성도 잃었다.

▶신촌은 청년 문화의 성지이자 산실이었다. 영화 ‘바보들의 행진’과 ‘겨울 나그네’는 1970~1980년대 신촌을 배경으로 탄생했다. 김현식·이광조·이정선·엄인호·한영애가 밴드 ‘신촌블루스’에서 활동했다. 그들의 아지트이자 인근 대학생들이 즐겨 찾던 카페와 주점, 서점이 문을 닫거나 연남동, 홍대 등으로 옮기며 활기를 잃었다. 장사가 되자 임대료를 과도하게 올려 상인들을 밀어낸 탓도 있지만 변화에 뒤처진 것이 근본적인 문제일 것이다. 신촌 상인들이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다시 일어나 옛 활기를 되찾기를 기원한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manmulsang/2024/02/04/CAEEBQFNCNHHHKVNC6DPOYYPW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