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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1만년전 매머드 엄니의 비밀 푼 과학, 6·25 전사 미군 신원 밝혀냈다

박건형 기자
입력 2024.02.06. 03:00 업데이트 2024.02.06. 15:49

[박건형의 닥터 사이언스] 1만4000년 전 유콘에서 태어나 스완 포인트에서 죽은 매머드 엘마
미국 연구팀, 동위원소 분석으로 이동 경로와 죽은 이유까지 재구성
6·25 전사자 신원 확인에도 활용… 4년간 미군 88명 고향으로 돌아가

일러스트=이철원


1만4000년 전, 캐나다 북서부 유콘에서 암컷 매머드 엘마가 태어났다. 유콘은 10만 년 전부터 조상 대대로 살아온 매머드 집단 거주지였다. 뜯어 먹을 풀이 넘쳐나는 건조한 초원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빙하기가 끝나면서 습지가 생기고 나무가 자라자 초원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굶주린 엘마와 동료는 풍족한 땅을 찾아 무작정 길을 떠났다. 1000㎞에 이르는 여정 끝에 알래스카 동부 스완 포인트에 도착했지만, 그들을 반긴 것은 먹이만이 아니었다. 몸무게가 6~8t에 이르는 거대 포유류 매머드를 식량으로 삼을 수 있는 유일한 천적, 바로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매머드 평균수명은 60년이었지만, 엘마는 20살의 젊은 나이에 사냥감이 되어 생을 마감했다.

엘마의 생애를 추적하는 연구는 2009년 스완 포인트에서 온전한 매머드 화석이 발견되면서 시작됐다. 당시 발굴팀은 매머드 화석에 지역 원주민어로 ‘재미있어 보이는 것’이라는 뜻을 가진 ‘엘마요우제이에’라는 이름을 붙였고 ‘엘마’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알래스카 페어뱅크스대 연구팀은 1.6m에 이르는 엘마의 엄니를 집중적으로 분석했다. 매머드의 엄니는 매일 일정하게 원뿔 형태로 상아 층을 쌓아가며 자란다. 과학자들은 이를 ‘아이스크림 콘을 하나씩 쌓는 것 같다’고 묘사한다. 이 과정에서 매머드가 살았던 환경, 먹이, 물에 담긴 원소들이 상아 층에 순서대로 화학적 표지를 남긴다. 엄니의 뾰족한 끝부분에는 어린 시절이, 굵은 뿌리에는 나이가 든 뒤의 기록이 남아있는 식이다. 매머드의 엄니가 나무의 나이테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화학적 표지는 스트론튬(Sr) 동위원소 분석으로 읽어낸다. 스트론튬에는 양성자 수는 38개로 같지만 질량이 다른 동위원소가 네 종류 있는데, 그 비율이 지역에 따라 다르다. 암석이 부서지면서 스트론튬이 땅에 스며들고, 여기서 자라난 식물과 그 식물을 먹은 매머드에 모두 같은 동위원소 비율의 스트론튬이 축적되기 때문에 어느 시점에 어느 곳에서 무엇을 먹었는지까지 알 수 있다.

연구팀은 지난달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에 “미 지질조사국의 지역별 스트론튬 동위원소 비율 자료와 엘마의 엄니 분석 기록을 비교해 엘마의 일생을 재구성한 전기(傳記)를 완성했다”고 발표했다. 엘마의 사인(死因) 규명에는 지질학과 고고학이 동원됐다. 동위원소 분석 결과 엘마는 죽기 직전 영양 상태가 좋았고 특별한 질병의 징후도 없었다. 청년 매머드가 뜻하지 않은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뜻이다. 연구팀은 엘마가 발견된 스완 포인트에 같은 시대에 사람들이 무리 지어 살면서 사냥과 낚시를 위한 캠프를 곳곳에 차린 유적지가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유적지에서는 매머드 사냥에 사용했던 날카로운 촉과 매머드 화석이 대거 발견됐다. 특히 엘마는 늦여름에서 초가을 사이에 죽었는데, 원주민들이 이 지역에서 매머드 사냥에 본격적으로 나서던 시기와 일치했다. 엘마가 엄니에 ‘자신이 건강했고 급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는 일종의 ‘다잉(dying·임종) 메시지’를 남겨둔 덕분에 알게 된 사실이다. 연구팀은 “매머드가 기후변화와 인간의 사냥이라는 가혹한 압력을 동시에 받으면서 멸종했다는 점을 보여준다”고 했다. 매머드 대부분은 1만년 전 사라졌고,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일부 섬에서만 더 늦게까지 살아남았다.

멸종 동물 연구, 고인류 연구로 발전한 동위원소 분석은 최근 참전 용사 신원 확인에 활용된다. 유골에서 DNA를 추출해 유족과 비교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지만, DNA는 세대가 거듭될수록 신원 확인 가능성이 4분의 1씩 떨어진다. 현재 기술로는 2촌 이내만 확인할 수 있고, 국적 식별도 불가능하다. 중공군과 한국군조차 구분할 수 없다. 하지만 치아나 뼈에 새겨진 스트론튬 동위원소를 분석하면 전사자가 어느 지역에서 태어났고 어떻게 자랐는지 알 수 있다. 고향과 인생을 찾아 신원 확인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는 것이다. 미 국방부 전쟁포로·실종자확인국(DPAA)은 2019년 동위원소 분석 실험실을 설립해 지난해까지 한국에서 88명의 미군 신원을 확인했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 이 지구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이 이국땅에서 잊혀질 뻔했던 청춘의 넋까지 달래주고 있다.

원글: https://www.chosun.com/economy/science/2024/02/06/USGWMWO6YRAOBAWH2CPYNQ536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