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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오세혁의 극적인 순간] 술을 마시지 말고 사람을 마셔라

오세혁 극작가·연출가
입력 2024.04.04. 03:00 업데이트 2024.04.04. 05:50

일러스트=이철원


술은 무슨 맛으로 마실까? 아버지가 집에서 홀로 바둑을 두며 소주를 마실 때마다 떠올린 질문이다. 말없이 바둑판을 들여다보다가 말없이 소주를 삼키고는 ‘크으’ 내뱉는 소리. 삼키는 소리인지 내뱉는 소리인지 모를 그 미묘한 소리. 그 소리가 지나가면 고개를 들고 나를 찾았다. 내가 옆에서 숙제를 하거나 책을 읽고 있으면, 벌게진 얼굴로 씩 웃고는 동전을 한 움큼 내 손에 올려주었다. 동전을 받는 맛으로 거의 매일 밤 아버지 곁에 있었다.

그러다 언젠가 술맛이 딱히 달콤하지는 않을 거라고 느낀 적이 있다. 숙제하다 잠들었는데 반복되는 ‘크으’ 소리에 잠을 깼다. 아버지는 불 꺼진 방에서 보이지도 않는 바둑판을 바라보며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는데, ‘크으’ 소리가 언제부턴가 들리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후,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나에게도 익숙한 소리였다. 내가 무언가 속상해서 울 때 내는 소리였다. 아버지가 우는 걸까. 나는 그날 밤 눈을 뜨지 못했다.

며칠 후 우리 집은 더 작은 곳으로 이사 갔다. 아버지가 친구의 빚 보증을 잘못 섰다는 사실을 한참 후에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어두운 방에서 소주를 마시는 날이 많았다. 어두운 방에서는 숙제를 할 수도 없고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 아버지 얼굴을 읽을 수도 없었다. ’크으’ 소리를 계속 들으면, 뭔가 세상의 쓴맛을 너무 일찍 알 것 같았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을 찾아 친구 집과 오락실과 도서관을 맴돌았다. 어느새 마시는 모습보다는 마신 후에 이불도 없이 누워있는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되었다. 나는 점점 더 아버지가 잠들었을 때 들어왔고, 아버지가 일어나기 전에 학교에 갔다. ‘크으’ 소리는 점점 더 멀어지고 아련해졌다.

시간이 흘러 내가 대학 기숙사로 떠나기 전날 밤, 아버지와 소주를 놓고 마주 앉았다. 아버지가 나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나도 아버지에게 술을 따라드렸다. 두 사람이 동시에 ‘크으’ 소리를 냈다. 그 순간, 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어색해서 대화인지 혼잣말인지 모르게 중얼거렸다. “술은 무슨 맛으로 마시는 거야?” 그 순간,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문이 열렸다. 술은 어떻게 마셔야 하고, 어떻게 예의를 지켜야 하고, 술에 취하면 어떻게 해야 하고…. “그러니까, 술이 아니라, 사람을 마신다고 생각하면 돼.” 아버지는 그 많은 말이 어색했는지 그대로 드러누웠다. 나는 방으로 돌아가려다가 마음을 먹고 옆에 드러누웠다. 어차피 다음 날이 되면 나는 다른 도시로 떠나고, 한동안 우리가 만날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우리 두 사람은 한동안 어색한 숨소리만 뱉어냈다. 그러다 불쑥, 아버지도 대화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이제야 같이 마시네. … 이제 됐어.

그날 새벽 나는 잠시 잠에서 깼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의 그 ‘훌쩍’ 소리를 또 한번 들은 것 같다. 나는 이번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날 아침 나는 집을 떠났고, 그 이후 우리가 술을 마신 날은 열 번도 되지 않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나는 종종 홀로 소주를 마시는데, 그때마다 익숙한 ‘크으’ 소리에 놀라곤 한다. 아버지의 소리가 내 안에도 있었다.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이 ‘크으’ 소리가 왜 삼키는 소리와 내뱉는 소리의 경계에 있었는지. 언젠가 내가 한 연극에서, 술에 관한 긴 독백을 쓴 적이 있다. 그날 밤 아버지가 들려준 술 마시는 법이었다.

“… 받을 때는 신중하게 받고 마실 때는 시원하게 마셔라. 마시고 나서는 주변에 빈 잔들이 없는지 확인해라. 따를 때도 밝게 따르고 받을 때도 밝게 받아라. 술 마시는 동안에는 취하지 말고 다 마시고 헤어질 때부터 취해라. 마시는 동안 취했으면 바깥에 나가 바람을 쐬고 오거나 조용히 집에 와라. 술은 긴장을 풀려고 마시는 것이지만 절대로 긴장을 풀면 안 된다. 긴장이 풀리면 주사를 부린다. 주사는 친구가 떨어져 나가는 지름길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만 지켜도 술자리에서 실수를 안 한다. 이게 내가 너한테 주는 유일한 조언이자 유산이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4/04/04/LFANOHOUMVHNXEQ3ZAO5QXK23A/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