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방산 신화를 만든 사람들] [2] 'T-50′ 개발 주도한 전영훈 박사
성유진 기자
입력 2024.10.23. 00:55 업데이트 2024.10.23. 07:09
2002년 8월 20일 경남 사천 비행장 활주로. 공군 조광제 중령이 초음속 고등 훈련기 ‘T-50(별칭 골든 이글)’ 조종간을 잡고 하늘로 비상했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 경영진과 T-50 개발자들은 기체가 무사히 비행을 마치고 다시 눈앞에 나타나길 초조하게 기다렸다. 40분 후, T-50이 사뿐히 땅으로 내려앉자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만세를 불렀다. 1989년 국방과학연구소(ADD)가 개발을 제안하며 첫발을 내디딘 첫 국산 초음속 고등 훈련기 ‘T-50′이 초도 비행(첫 비행)에 성공한 순간이었다.
초도 비행은 비행기 설계가 제대로 됐는지, 수만개 부품이 모두 정상적으로 기능하는지를 확인하는 항공기 개발의 가장중요한 순간 중 하나다. 그 이후 시제기를 계속 만들고 시험 비행 과정을 여러번 거쳐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간다. T-50은 2005년 양산을 시작해 6년 만인 2011년 인도네시아로 첫 수출에 성공했다. 이어 이라크·폴란드 등 중동·유럽 시장까지 뚫었다. 현재까지 수출된 T-50 계열 항공기는 6국에 138대, 총 78억달러(약 10조7000억원)에 달한다. T-50은 세계 최강인 미 해군의 고등 훈련기 사업 수주에도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22년 전 사천 비행장에서 T-50 초도 비행을 지켜본 사람 중 한 명인 전영훈(77) 박사. K방산의 핵심 품목이 된 T-50의 탄생을 이끈 조종사 출신 주역이다. 그를 만나 T-50 탄생의 비화와 함께, 지금도 커지고 있는 T-50의 꿈을 들어봤다.
그는 1970년 공군 소위로 임관해 미국 전투기 팬텀을 몰다가 제대로 된 국산 전투기 개발의 꿈을 꾸었다. 공군 유학생으로 뽑혀 미 미시시피 주립대에서 항공공학 석사·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달 경기 김포 자택 근처에서 만난 전 박사는 “T-50 기초 연구비로 첫해(1990년) 배정받은 돈은 단돈 530만원이었다”면서 T-50 개발을 둘러싼 과거 이야기를 시작했다.
◇530만원으로 시작한 국산 항공기의 꿈
그는 “당시 우리 공군 내부는 물론 ADD에서조차 ‘기술도 돈도 없는데 사서 쓰면 되지 왜 굳이 개발을 해야 하느냐’는 반대 목소리가 컸었다”며 “하지만 한번 구입하면 30~40년은 사용하는 항공기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지금 포기하면 한참 뒤에나 후대에 기회가 올 거 같아 매일 아침 연구계획실장을 찾아가 졸랐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첫해 ‘기초 연구’란 단서를 달고 배정된 예산이 530만원이었다.
적은 예산으로 겨우 굴러가던 사업은 1991년 우리 군이 록히드마틴과 전투기 F-16 구매 계약을 맺으며 급물살을 탔다. 절충 교역(무기 도입 대가로 기술이전 등을 받는 방식)으로 록히드마틴 연구진에게 고등 훈련기 개발 기술을 배울 기회를 얻게 됐기 때문이다. 이듬해 가을 ADD·삼성항공(현 KAI) 연구원 10여 명이 1차 선두 인원으로 미국 텍사스주 포트워스에 있는 록히드마틴 공장으로 떠났다. 이 공장에서 5㎞쯤 떨어진 조립식 건물이 이들의 연구실이었다.
전 박사는 “록히드마틴 사람들과 친해지면 기술 하나라도 더 알려줄까 싶어 바비큐 파티까지 열어주며 친분을 쌓았다”고 했다. 3년간 총 89명의 연구원·엔지니어가 동고동락하며 기체 설계부터 성능 시험 방식까지 고등 훈련기 개발 기술을 배웠다.
◇‘신의 한 수’ 된 초음속 항공기
T-50의 첫 형태는 영국 ‘호크기’ 같은 아음속(음속 이하) 훈련기였다. 그러나 골든 이글 개발팀은 논의 끝에 초음속 항공기로 방향을 틀었다. 고등 훈련기도 전투기처럼 기동성이 뛰어난 초음속을 원하는 추세였고, 아음속 훈련기는 이미 여러 나라에서 개발해 판매 중인 만큼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봤다. 당시 격려차 찾아왔던 조근해 공군참모총장 등을 설득해 초음속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었다. 전 박사는 “개발 후에는 수출이 필수인데, 그러려면 세계시장에서 더 수요가 많아질 초음속이 맞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방향 전환은 ‘신의 한 수’가 됐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수출한 T-50 계열 항공기는 기본형(고등 훈련기 T-50)보다 이를 다목적 전투기로 개량한 ‘FA-50′이 더 많다. 초음속이기에 전투기로 개량이 가능했고, 더 많은 국가를 공략하게 된 것이다.
부족했던 기술력은 록히드마틴과의 공동 개발로 채웠다. 초음속 항공기는 소리의 속도(마하 1.0)를 돌파하기 위해 공기의 저항을 견딜 수 있는 구조로 설계해야 한다. 재료나 엔진 같은 부품에도 아음속 항공기보다 더 공을 들여야 한다. 필요한 부품만 35만개에 달하고 성능 시험도 더 많이 반복해야 하는 만큼 개발 비용도 올라간다. 전 박사는 “비용이나 기술 문제뿐 아니라 나중에 수출할 때 우리 혼자 개발한 것보다 록히드마틴이라는 파트너를 내세워야 믿음을 줄 수 있을 거라고 봤다”고 했다.
◇선박·자동차 인력까지 끌어모아
골든 이글팀은 1997년 기체를 설계하고 성능을 시험하는 본격적인 개발 단계에 들어갔다. 하지만 고등 훈련기를 설계할 인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미국에 다녀온 89명을 포함한 100명 정도가 전문 지식을 갖춘 인원의 전부였다. 이 인원으론 공군에 약속한 기한 안에 개발을 끝내기가 어려웠다. 골든 이글 팀은 사방에서 개발 인력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전 박사는 “당시 IMF 사태로 자동차나 선박 쪽에서 실직자가 많이 나왔는데, 여기서 일한 기술자까지 데려왔다”고 했다. 야전 침대를 갖다 놓은 사무실에서 낮에는 설계하고 밤에는 서로 배우고 가르쳐주는 주경야독을 몇 개월간 반복했다.
설계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전 박사는 “전차는 고장 나면 멈춰서 수리하면 되고 문 한 짝이 떨어져도 운행할 수 있지만, 항공기는 부품 하나만 어긋나도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1차 설계를 마칠 시점에 항공기 전방·중앙·후방 동체의 중심축을 담당한 팀마다 서로 다르게 잡았다는 걸 깨닫고 처음부터 다시 설계를 시작해야 했다. 프랑스에서 공수해온 랜딩기어(착륙 장치)에 문제가 생겨 연구원 한 명이 프랑스로 날아가 겨우 새로운 랜딩기어를 구해오기도 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T-50이 탄생한 것이다.
◇방산 본고장 미국 시장에도 도전
엔진 같은 주요 부품 대부분을 외국에서 사오는 등 국산화율이 낮은 한계도 있었다. 하지만 전 박사는 “기술력이나 개발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록히드마틴과 함께 개발한 게 결국 옳은 결정이었다”고 했다. T-50을 통한 초음속기 개발 경험은 현재 KAI가 개발 중인 초음속 전투기 ‘KF-21(별칭 보라매)’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차세대 항공기 개발의 초석이 된 셈이다.
T-50은 조만간 방산의 본고장 미국 시장에도 도전한다. 미국 정부는 2028년 입찰을 목표로 해군 고등 훈련기 도입을 추진 중인데, 여기에 KAI가 T-50으로 참여할 예정이다. 방산 업계에선 KAI·록히드마틴이 한 팀이 돼 보잉·사브(스웨덴 방산업체) 연합과 겨루게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원글: https://www.chosun.com/economy/industry-company/2024/10/23/J5KUOVI57NAMBJMFSHVXKF3HTM/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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