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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만물상] 다변 대통령

김진명 기자
입력 2025.01.31. 20:38 업데이트 2025.01.31. 22:58

일러스트=이철원


2009년 9월 23일, 리비아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가 유엔총회에 등장했다. 신종 플루가 군사용으로 개발된 것 같다는 음모론부터 존 F 케네디가 이스라엘 핵무기를 조사하려다 암살됐다는 주장까지 1시간 36분간 장광설을 쏟아냈다. 그런 카다피도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를 이기지는 못했다. 다변(多辯)으로 유명했던 카스트로는 1960년 9월 26일 유엔총회에서 4시간 29분간 연설해 “마라톤 스피커”란 별명을 얻었다. 유엔총회에서 국가 정상이 한 연설로는 최장 기록이다. 1986년 쿠바 공산당 대회에서 그는 무려 7시간 10분 동안 연설했다.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는 ‘TV형 다변가’였다. 2007년 한 프로그램에서 8시간 생방송을 했다.

유엔은 총회 참석 정상들에게 15분 정도의 연설을 권하지만, 정치인들이 모이다 보니 5분 정도 초과되는 것은 예사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2016년 38분간 ‘고별 연설’을 해서 눈총을 받았는데, 이 기록은 이듬해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의해 금방 깨졌다. 한번 유세에 나섰다 하면 70~90분씩 연설하는 트럼프는 첫 유엔총회에서도 41분간 발언했다. “로켓맨(북한 김정은)이 자살 임무 중” 등의 말이 세계를 흔들었다.

▶한국 대통령 중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다변으로 유명했다. 기자 간담회 발언을 정리하면 200자 원고지로 100~150장쯤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각 언론사의 청와대 출입 기자 중 막내뻘인 ‘말진 기자’들은 간담회 내용을 받아 적느라 “쉴 새 없이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손가락이 부러지는 줄 알았다”고 호소할 정도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달변가로 꼽히지만, ‘돌발 발언’이 별로 없다는 점이 노 전 대통령과 달랐다. 주제별로 정리된 생각이 있어서, 관련 질문이 나오면 매번 비슷한 답변을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를 오래 취재한 기자라면 어느 정도 발언을 예상할 수 있어 정리하기 수월했다는 평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다변에 대응하기 위해 백악관이 속기사 증원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트럼프가 취임 첫 주 카메라 앞에서 공개 발언을 한 시간만 7시간 44분으로, 바이든 전 대통령(2시간 36분)보다 훨씬 길었다. 사용한 단어 수로 보면 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 ‘햄릿’, ‘리처드 3세’를 합친 것보다 많은 8만1235단어를 썼다는 통계도 있다.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세상이 요동치니, 그만큼 말할 맛이 나는지도 모르겠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manmulsang/2025/01/31/P7X4DA4AG5DLZGMYY36WXIBA5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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