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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문태준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詩] [66] 이슬 세상

문태준 시인
입력 2025.04.13. 23:52

일러스트=이철원


이슬 세상

이슬들 모여 앉아 쪽방촌을 이루었다
아침 물고 날아온 새, 살짝 떨군 물똥처럼
물방울 은빛 사리가 가지런히 눈부신 곳
오늘의 특별 손님, 실잠자리, 무당벌레
터줏대감 소금쟁이, 청개구리, 까마중
조금은 옹색하지만 불평 없이 동거하는
주인도 세를 사는 하늘이 맑은 동네
온몸을 톡, 던져서 풀잎 발등 적시는
작아서 더 좋은 것, 저 깨끗한 전신공양

-유재영(1948~)

풀잎 위에 떨어진, 영롱한 이슬을 이 시조에 간곡하게 모셨다. 하늘 아래 첫 동네처럼 깨끗한 자연이 있는 곳인데, 그곳의 생명 살림을 쪽방촌에 빗대었다. 작고 좁은 방이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모인 이 쪽방촌에는 거주하는 생명이 많다. 사람, 날고 기는 것, 물에 사는 것, 한해살이풀까지 함께 산다.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아도 못마땅해하지 않으니 더없이 맑고, 화평하고, 서로에게 헌신하고 보살피는 세상이다. 시어 가운데 “살짝”과 “톡”은 “작아서 더 좋은 것”을 실감케 하기에 매우 적절하게 선택된 듯하다.

유재영 시인은 시조를 쓴 지 52년을 맞았다. 최근에 시조집을 내면서 “나는 율격주의자이다. 시조의 형식을 파괴하며 시조를 쓰지 않는다”고 밝혔다. ‘달항아리 어머니’라는 시조의 셋째 수는 이렇다. “모진 세월 무명옷이 몇 벌이나 해졌을까/ 울 어머니, 그렁그렁 눈물로 받든 하늘/ 달이 된 항아리 하나 저리 둥실 떠있다” 엄격하게 율격을 지킨, 시조 미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시조라고 하겠다.

유재영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04/13/DTCOADQ3UBAW7AE3PI7SZDAGTM/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