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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만물상] 교황의 묘비명

김태훈 논설위원
입력 2025.04.22. 20:12 업데이트 2025.04.23. 00:02

일러스트=이철원


죽은 이의 삶을 기록하는 묘비명(墓碑銘)은 미라를 만들던 고대 이집트 때부터 있었다. 망자의 나이와 관직, 이름을 적었다. 로마인들은 묘비명에 망자의 삶도 담고자 했다. 눈길 끄는 문장이나 시(詩)로 인생을 축약했다. 오가는 사람들이 묘비명을 읽고 고인을 오래 기억하도록 묘를 붐비는 길가에 썼다.

▶묘비명 작성엔 문학적 함축과 은유, 기발한 아이디어가 동원된다. 심지어 문장을 쓰지 않기도 한다. 원주율을 소수점 이하 35개까지 계산한 네덜란드 수학자 뤼돌프 판쾰런의 묘비명은 그가 계산해 낸 원주율 숫자다. 가수 휘트니 휴스턴의 묘비명은 ‘THE VOICE(목소리)'다. 그녀의 팬들은 정관사 ‘the’를 붙임으로써 휴스턴의 목소리가 해와 달처럼 유일하다는 찬사를 바쳤다. ‘로마의 휴일’에서 열연한 배우 그레고리 펙 부부의 묘비명엔 애틋한 부부의 정이 담겼다. 펙의 아내는 남편 사후 9년 뒤 눈을 감으며 합장할 것과 ‘영원히 함께’란 묘비명을 새기라고 유언했다.

▶21일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묘비명이 공개됐다. 아무 장식 없는 비석에 프란치스코의 라틴어 표기인 ‘Franciscus(프란치스쿠스)'만 적는다. 생몰연도, 재위 기간도 새기지 말라고 했다. 입관 의식을 생략할 것과, 장례는 교황청 돈이 아닌 생전에 자신이 모은 돈으로 간소하게 치르라고 당부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청빈(淸貧)을 평생의 지표로 삼았던 교황다운 마무리다.

▶생전의 교황은 다정하고 소탈했다. 누가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 물으면 이탈리아어로 ‘casalingo(가정적)’인 사람이라 답했다. 독신을 맹세한 사제로서 하느님의 자녀를 가족으로 섬겼다. 소아 병원을 찾아가거나 노숙자들을 교황청에 초대해 손수 발을 씻기며 “고통받는 이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저의 소명”이라고 고백하는 교황을 사람들은 사랑하고 존경했다.

▶정치적으로는 진보 성향이었다. 빈부격차 해소를 촉구했고 동성애 문제에도 기존의 보수적 교회와 달리 전향적이었다. 세상을 바꾸려면 혁명이 필요하다고 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수단은 어디까지나 ‘호의’와 ‘상냥함’이라고 했다. 영화 ‘두 교황’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식사 기도가 길어지자 당시 추기경이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피자를 집어들다가 슬그머니 내려놓는 장면은 그의 인간적 면모를 드러낸 명장면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비록 한 단어의 이름으로 남겠지만 그의 묘비명을 보는 이들은 교황의 전 생애를 기억할 것이다. “교황님, 저희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기도하면서.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manmulsang/2025/04/22/WOHU76FPYFCZXMZ3F7YVJ7JMBY/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