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현우 용접공·작가
입력 2025.04.24. 00:21 업데이트 2025.04.24. 01:05
인생게임이란 보드게임이 있다. 원문부터 The Game of life. 성인에서 시작해 칸이 앞으로 나갈수록 노년기로 향하는 구성이다. ‘인생’이란 큼직한 단어를 차용했지만 실제로는 ‘은퇴까지 얼마나 벌 수 있을까’가 핵심이다. 맨 마지막 칸에 도달하면 ‘은퇴’라는 설정이고, 모두가 은퇴했을 때 재산이 가장 많은 사람이 이긴다.
이 게임은 시작할 때 대학을 갈지 바로 취업할지 결정한다. 바로 취업하면 일찍 돈을 벌 수 있지만 고점이 낮다. 반면 진학하면 직장 생활이 늦어지고 학자금도 나가지만 취업 후 돈을 더 벌 수 있다. 1960년도에 출시한 이 고전 게임은 취업과 진학을 같은 선상에 두고 표현하고 있다.
그럼 2025년의 현실은 어떨까. 적어도 한국에선 대학 미진학이 사실상 ‘평균 미만’의 삶으로 향하는 비탈길이다. 2023년 기준 대학 진학률 76.2%란 숫자가 이 현실을 증명한다.
오해는 마시라. 대졸자가 너무 많다는 주장이 아니다. 대학 이외 선택지가 없는 현실을 비판하려 함이다. 다만 ‘대학 안 나와도 잘 먹고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반쪽짜리 주장이다. ‘누구나 대학을 갈 수 있는 나라여야 한다’는 답안도 충분하지 않다. ‘대학 안 가도 학습을 이어나갈 수 있는 선택지’가 필요하다.
평생 교육이야말로 선진국이 가져야 할 덕목이다. 특히 국토 좁고 자원 안 나는 우리나라엔 국민 개개인의 역량 증진이 필수다. 그리고 그 역량이 임금과 대우로 이어져야 한다.
이 전제를 토대로 현실 진단을 해보자. 대한민국은 현재 대학 안 가도 학습할 수 있는 교육 사다리를 충분히 갖추고 있는가. 나는 한국 직업 교육 수준이 형편없다는 얘기를 줄기차게 해왔다. 그럼 좀 더 작은 단위의 질문을 해보자. 애초에 이 국가는 대학 안 나온 학생들의 ‘학습’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가.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를 쓴 허태준 작가는 마이스터고 졸업생이다. 본인과 같은 직업계고 학생들이 처한 현실을 알리려 애쓰고 있다. 하지만 정책 토론회나 부처 담당자를 만날 때면 어지러움을 느낀다고 한다. 공무원들이 현실하고 안 맞는 제도를 바꿀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때는 2017년 11월로 돌아간다. 제주도에서 현장 실습을 하던 고3 이민호군이 생수 공장 기계 정비 중 사망했다. 12월 교육부는 ‘직업계고 현장 실습 제도 개선 방안’을 발표했다. ‘조기 취업’이었던 현장 실습을 폐지. ‘학습 중심’ 현장 실습으로 전환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조기 취업’이 ‘학습 중심’으로 바뀌면서 현장 실습 기간을 6개월에서 3개월로 줄였다. 이 과정에서 현장 실습생들은 고용보험 대상에서 제외됐다. 그 이유가 현장 실습은 이제 ‘취업’이 아니라 ‘학습’이라는 점이란다. 즉 현장 실습은 퇴직금이나 실업급여를 받기 위한 기간으로 적용되지 않는다.
‘취업’이 아니라 ‘학습’이라서, 이 말이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는 현장 실습생 고용하는 회사들 현실만 봐도 알 수 있다. 거의 영세 업체 내지는 하청 공장이다. 경쟁력 있는 기술을 가르칠 수가 없다. 없는 걸 어떻게 가르쳐주나. 당연히 단순 노동이 대부분이라 뭘 배우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학생들은 현장은 위험하고 대우는 열악하며 임금은 최저인 장소에서 명백히 근로자로서 일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3개월로 줄였던 현장 실습 기간은 고작 1년 만에 6개월로 도로 늘어났다. 왜? 학생들이 기간 단축을 격렬하게 반대해서. 현장 실습의 현실은 학생들이 가장 잘 안다. 제도는 전혀 본래 취지대로 돌아가지 않으며, 자기 전공과 다른 업체로 갈 확률이 더 높고, 운 좋게 전공 맞는 업체로 간다고 한들, 제대로 된 기술 못 배운다는 사실까지 다 안다. 더럽고 치사한 현실을 알지만 최저임금 그 몇 푼 안 되는 월급마저 절실해서 더 길게 일하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이런 학생들에게 퇴직금이며 실업급여가 얼마나 절박할지는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다.
직업계고 학생들은 정규 교육에서 열외당한 약자다. 국가가 약자를 무작정 구제해 줄 순 없다. 다만 약자가 온당한 대우를 받도록 함은 제도나 철학 이전에 상식이다. 현실과 안 맞는 제도를 방치하지 말자. 지금이라도 학생들이 올바른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개정해야 한다. 직업계고 학생들의 현장 실습 기간을 고용보험 기간에 포함하자. 노동이 아니라 학습이어서라는 말장난은 관두자. 당최 남들 공부할 때 일해야 하는 현실에 떠밀린 이들을 건져 올리진 못할망정 가라앉도록 내버려둘 이유가 뭔가.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04/24/NMXWNTVD5VHK3AJMZVAGAVJD6M/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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