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훈 논설위원
입력 2025.06.02. 20:17 업데이트 2025.06.02. 23:56
필자 동네 백화점엔 손님을 위한 불멍 화로가 있다. 진짜 불이 아니라 화로에 장작이 타는 동영상인데도 소파 앞에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 있게 된다. 불의 색깔과 타오르는 모양이 일종의 무아지경인 트랜스(trance) 상태를 경험하게 한다. 불은 반대로 근육과 신경을 긴장시키거나 감정이 들떠 흥분하게도 한다.
▶그런데 이런 흥분 감정으로 불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리학에서 ‘병적(病的) 방화’라고 부른다. 이런 사람들은 불을 내기 전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는 것을 즐기고 방화 후 강렬한 쾌감과 함께 긴장이 해소되는 경험을 한다. 한 번 경험하면 반복하는 특성이 있다. 불을 질러선 안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성을 마비시킬 목적으로 방화 전에 술을 마시기도 한다. 지난주 경기도에서 오피스텔에 불을 지른 남자가 그런 사례였다. 방화 미수로 복역하고 출소한 다음 날 술을 마시고 또 불을 질렀다가 체포됐다.
▶충동 방화 외에 분풀이 방화도 있다. 지난 주말 서울 지하철 5호선 방화 사건이 그 예다. 참사를 부를 뻔했는데 고작 이혼하게 된 억울한 사정을 알리고 싶었다니 어이가 없다. 문제는 사회적으로 큰 충격을 준 대부분의 방화 사건이 분풀이 범죄라는 데 있다.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은 토지 보상금을 적게 받은 것에 불만을 품은 남자가 저질렀다. 10여 년 전, 8명의 생명을 앗아간 잠실 고시원 화재도 여자 친구에게 실연당한 남자가 화풀이로 자기 침대에 불을 붙인 것이 원인이었다.
▶방화는 세상에 큰 상처를 남기지만 정작 범인을 잡고 보면 소심하고 내성적이라고 한다. 분노 지수는 높지만 성격은 나약해서 폭행이나 살인처럼 희생자를 직접 노리기보다는 건물이나 물건을 범행 대상으로 삼는다. 불을 피해 사람들이 도망가거나 소방차가 달려오는 것을 보며 “내가 이 상황을 지배한다”는 권력감을 즐긴다고도 한다. 숭례문 방화범은 검거 후 “사람을 죽인 건 아니지 않냐”고 했는데, 이번 지하철 방화범도 “아무도 안 죽지 않았냐”고 했다.
▶방화로 인한 피해는 막대하기 때문에 많은 나라가 엄벌로 다스린다. 일본은 막부 시절 방화와 실화를 가리지 않고 불 낸 이를 처형했다. 우리나라에선 연간 1000건 넘는 방화 범죄가 발생한다. 놀랍게도 다른 흉악범들과 달리 분풀이 방화범은 잡히고 나면 자신의 억울함을 수다스러울 정도로 토로한다고 한다. 충동이든, 분풀이든, 실화든 화재는 같다. 대비해야 하고 대비하면 피해를 줄일 수 있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manmulsang/2025/06/02/FPIQ4S6HCJFQFE7FPRG5226OJY/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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