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혁 극작가·연출가
입력 2025.08.20. 23:51
10년 동료 알고 보니 색약, 의상·소품 색을 모두 외워 일했다
말이 없고 발이 빠른 그를 모두가 사랑해… 노력은 아름다워

정철 연출은 나랑 함께 일하는 가장 오래된 동료다. 10년 전에 대구에서 연극 ‘늙은 소년들의 왕국’을 공연했다. 공연이 끝난 후 한 대학생이 어색한 표정으로 다가와서 극단에 들어오고 싶다고 했다. 그때 우리는 몸 하나와 의지 하나로 1년에 200회가 넘게 전국을 떠돌며 공연하는 마당 극단이었다. 정철의 말이 고마웠지만 우리의 활동이 너무 바쁘고 힘들었기에 쉽게 추천할 수가 없었다.
근데 정철은 정말로 대구에서 안산으로 올라왔다. 정철의 꿈은 연출이었기에 그날 이후로 조연출로 활동했다. 정철은 하루 만에 우리 극단의 보물이 되었다. 언제나 말없이 조용했지만 행동은 누구보다 빨랐다. 출근 시각 1시간 전에 와서 청소하고, 연습에 필요한 소품과 의상을 완벽하게 준비해 놓고, 연습이 끝나면 오래 연습실에 남아서 다음 날 할 일을 체크했다. 술을 잘 마시지 못했지만 언제나 자리에 앉아 동료들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때도 주로 듣기만 하고 말이 없었다. 강릉이나 부산처럼 먼 곳으로 공연을 갈 때도 가장 오랜 시간 운전석에 앉아서 먼 길을 떠나주었다. 혼자 그렇게 많은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계속 말해 주었지만 그때마다 또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연극이 좋아서’ 그런다고. 말이 없고 발이 빠른 정철을 모두가 사랑했다.
언젠가부터 잘 모르겠거나 답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늘 정철을 찾았다. 정철은 극단 연습실에 있는 모든 것의 위치를 알고 있었다. 공연에 쓰는 빨간색 목도리가 필요하면 정철이 가져다 주었다. 초록색 코트가 필요해도 정철이 가져다 주었다. 언제 어느 때나 무언가가 필요할 때마다 꼭 그 자리에 있는 정철은 차근차근 성장하여 큰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지금, 다양한 연극과 뮤지컬의 연출로 활약하며 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정철과 함께 공연한 배우와 스태프들은 가족같이 끈끈하며 정철과 함께하는 작업에 발 벗고 달려든다. 가끔 내가 질투가 날 정도로 좋은 사람들에게 매일매일 둘러싸여 있는 정철이 너무 자랑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정철이 조심스럽게 찾아왔다. 자신이 틈날 때마다 쓴 연극 대본이 있는데 읽어봐 줄 수 있냐고. 그 대본은 색깔을 구별하지 못하는 화가가 마음속에 품은 자신만의 색을 발견하기 위해 끝없이 그림을 그리는 이야기였다. 참으로 뭉클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였다. 어떻게 이런 이야기를 구상했냐고 물으니, 한참을 망설이던 정철은 놀라운 고백을 했다. 사실 자신은 적록색약이라서 색깔을 잘 구별하지 못한다고. 나는 너무 놀라서 계속 물어보았다. 그럼 어떻게 색깔이 있는 의상과 소품을 가져왔냐고. 정철은 쑥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계속 외웠다고. 동료들이 챙기는 의상과 소품을 보면서 그게 어떤 색을 지닌 것인지 외웠다고.
나는 한참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정철은 나와 함께한 10여 년간, 가장 먼저 가장 빨리 모든 것을 해결하는 친구였기 때문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답답하지 않았냐고. 정철이 대답했다. 가끔 답답하다고, 그 답답함이 오히려 더 열심히 살아갈 힘을 준다고. 연극 세계는 조명에 따라 한 무대가 빨강도 되고 초록도 된다고. 그렇게 상상력에 따라 색이 변하는 세상이라서 자신은 연극이 너무 좋다고. 내 기억에, 나는 그날 정철과 단둘이 정말 술을 정말 많이 마시며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다. 아마도 그날만큼은 내가 이야기를 하지 않고 정철의 이야기를 계속 들으려 노력한 것 같다.
연극과 관련해 단 하루도 멈추는 날이 없는 정철은 이제는 조명 디자인까지 배우고 있다. 스스로 빛의 색깔을 조절하고, 조명기 위치를 잡는다. 대체 조명 색은 어떻게 구별하느냐고는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철은, 계속해서 배우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명을 디자인하는 동료들 어깨너머로, 반복해서 보고 또 보면서, 아무리 시간이 걸려도 꾸준히 모든 것을 외워서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늘 그래왔듯이. 그리고 아마도, 정철이 외운 색들은 우리가 보는 색보다 선명할지도 모른다. 한 번 한 번 정성껏 외워야만 했던 그 색들은, 정철의 마음속에서 그 누구보다 뚜렷한 색으로 빛나고 있을 것이다.
빨간색 목도리를 ‘빨간색 목도리’라고 수백 번 되뇌었을 정철. 초록색 코트를 ‘초록색 코트’라고 수천 번 외웠을 정철. 그 반복의 시간이 쌓여서, 정철은 이제 자신만의 색을 만들어가는 연출이 되었다. 여전히 말이 없고, 여전히 발이 빠른 정철.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그 침묵 속에서 정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외우고, 기억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가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노력인지를.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08/20/76ZO4L7BIJGKTHRCULDOLQLEQU/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
'일러스트=이철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만물상] 北 당황시킨 장기수들의 長壽 (4) | 2025.08.22 |
|---|---|
| 10살 전치 6주 상해 입히고 "훈육"... 태권도 사범에 벌금형 (0) | 2025.08.22 |
| [만물상] 에어컨 없는 유럽 (2) | 2025.08.21 |
| [리빙포인트] 플라스틱 장난감은 소금물로 씻어보세요 (1) | 2025.08.20 |
| [장강명의 근미래의 풍경] '작은 정부, 빠른 정부, AI 정부'를 표방하자 벌어진 일 (4) | 2025.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