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 논설위원
입력 2025.10.10. 21:06 업데이트 2025.10.10. 23:58
10년 전 조선일보 베를린 특파원이 수퍼마켓에서 쇼핑 카트를 밀고 있는 독일 메르켈 총리를 만났다. 22년째 단골인 이곳에서 매주 장을 본다고 했다. 장식 없는 의상으로 이름난 메르켈은 이날도 평범한 베이지색 정장 차림이었다. 바뀌지 않는 검소한 패션의 이유를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모델이 아니고 공무원입니다.”
▶그는 인도주의 리더십으로도 유명했다. 2015년 시리아 내전 등으로 발생한 중동 및 아프리카의 100만 난민은 유럽 전체의 고민이었다. 다른 나라들이 뒷걸음질 칠 때 메르켈은 ‘우리는 할 수 있다’는 구호를 내세워 앞장섰다. 그해에만 난민 90만명이 독일 국경을 넘었다. 주간지 타임은 ‘올해의 인물’로 그를 선정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2016년 새해 전야의 쾰른 중앙역 광장. 예년이라면 신년 축하의 환호로 가득했겠지만, 이날 밤은 여성과 노인, 어린이의 비명으로 아수라장이었다. 아랍과 북아프리카 남성들이 집단으로 성희롱과 성폭력, 강도 행각을 벌였다. 경찰이 집계한 신고 건수만 1200건을 넘었고, 이 중 성희롱·성폭력이 절반에 육박했다. 용의자 대부분은 난민 신청자·불법 체류자였다. 지금 독일은 난민으로 고통받는 대표적 나라다.
▶미국과 동유럽이 강력히 반대했던 노르트스트림 가스관 건설을 강행한 것도 메르켈이었다. 러시아 천연가스를 독일까지 직접 수송하는 이 가스관은 추진 당시부터 우려가 컸다. 유럽의 대러시아 에너지 종속이 심화돼 러시아가 이 파이프라인을 정치적 무기로 삼을 거라는 경고였다. 하지만 탈원전으로 에너지가 부족했던 독일의 메르켈은 ‘실용주의’를 내세워 가스관 건설을 강행했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우려와 경고는 현실이 됐다.
▶엊그제 폴란드 전 총리가 메르켈을 “유럽에 가장 해로운 정치인”이라고 비난했다. 퇴임 후 조용하던 메르켈이 한 인터뷰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은 폴란드와 발트 3국(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 때문이라는 취지로 말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푸틴과 대화로 해결하려 했는데, 이 국가들이 협상 자체를 반대했다는 것이다. 해당 국가 정상들도 “생각이 없는 말” “푸틴의 선의?”라며 혀를 찼다. 메르켈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린 것’일까. 정치에서 이 말은 옳지 않은 듯하다. 차라리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는 오래된 격언이 더 와닿는다. 그때 메르켈은 자신의 선의로 상대의 선의를 믿고 전략적 오판을 했고, 그 결과 우크라이나는 지옥이 됐고 온 유럽이 불안에 떨고 있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manmulsang/2025/10/10/GOP6OJXG7BBZHOSFUQ752TN3ZU/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
'일러스트=이철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리빙포인트] 남은 송편은 참기름 발라 냉동실에 (0) | 2025.10.13 |
|---|---|
| [만물상] 캄보디아 (0) | 2025.10.13 |
| ♥[장미란의 무게여 안녕] 허리 통증으로 입원한 날들이 준 뜻밖의 선물 (0) | 2025.10.11 |
| [만물상] '영 포티' (1) | 2025.10.11 |
| 일상에서 벗어나… 풍요로움 한아름 안고 책더미에 파묻힐 시간 (1) | 2025.10.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