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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정희원의 나팔 소리] 한국 조직은 '가속 노화' 중… 뛰는 사람 발목 잡지 마라

정희원 내과 의사·서울건강총괄관
입력 2025.10.28. 23:34

1차선 정속 주행은 튀고 앞서면 트집 잡는 한국 사회의 축소판
'추월금지'와 하향 평준화 문화가 잠재력 죽이고 빨리 늙게 한다

지난 2011년 9월 27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미국을 방문하기 위해 부인 홍라희 여사와 함께 김포공항에서 출국장으로 향하던 중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조선일보 DB


“뛸 사람은 뛰어라. 바삐 걸을 사람은 걸어라. 말리지 않는다. 걷기 싫으면 놀아라. 안 내쫓는다. 그러나 남의 발목은 잡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이 남긴 이 말은 옛 영상이 공개되며 한때 인터넷에서 화제가 됐다. 핵심은 마지막 구절이다. 뛰기 싫으면 비켜 서기만 하면 될 텐데, 굳이 남을 붙잡아 끌어내리는 행태에 대한 일침이다. 사회에서 늘 보이는 이런 행위는 혁신하지 못하는 한국 조직 문화의 무기력을 설명한다. 이건희 회장의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비슷한 이야기를 병원 선배에게도 들었다. “적을 만들지 말아라. 세상에는 도움을 주는 이는 별로 없지만, 배알이 꼬이면 네가 하려는 일을 훼방하는 이가 무수히 많다.” 이 선배는 어떤 아이디어를 내면 항상 A안은 어떤 사람이 싫어할 것 같고, B안은 또 다른 누군가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것 같으니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줬다.

적당한 경쟁심은 개인과 조직에 자극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질투가 극단으로 치달으면 누군가 자신보다 잘나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고 모두 부나 능력 면에서 똑같거나 일정 수준 이하여야만 한다는 심리가 나타난다. 특히 관료화된 조직에서는 실력·혁신의 하향 평준화로 이어진다. 같은 권한을 가진 동료들은 튀어나온 이들을 불편해한다. 연공제에 의해 올라간 상관은 새로운 시도를 하는 부하 직원에게 ‘하지 않던 일을 왜 하려 하나’라며 제지한다. 결국 모두 눈치 보며 제자리걸음을 한다. 어차피 월급은 나온다는 생각에 본인 투자 대비 수익을 최대화하려는 현상 유지.

이때 조직 구성원들은 윗사람이 보기에 무언가 하고 있다는 척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연구를 위한 연구, 사업을 위한 사업, 행사를 위한 행사가 나타난다. 본말 전도 현상으로, 핵심 가치를 저버린 가짜 노동이 사람들의 자원을 장악한다. 이런 조직일수록, 상사가 고객이 되고 원래 고객은 의미를 잃는다. 윗분들이 관심 갖는 일에 에너지가 쏠리며, 현장 고객의 미충족 수요에 대한 관심은 끊어진다. 위에서 듣기 불편한 이야기를 현장 담당자가 윗선으로 올려 보낼 방법은 없다. 특히 중간 관리자 층이 병목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보고 과정에서 정보가 왜곡되거나 시간이 지연되고, 현장 담당자에게는 애초의 의도와 딴판인 지시가 내려오는 경우가 많아진다.

/일러스트=이철원


이를 한국 조직의 귤화위지(橘化爲枳) 현상이라고 나는 부른다. 해외에서 먼저 해 보았더니 성공적이던 사례나, 최근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일을 해 보자는 상향식 제안이 있을 수 있다. 이런 건의가 수용되는 경우가 있지만, 상부와 중간 관리자가 불편하지 않도록 많은 부분에서 내용이 왜곡되어, 귤이 탱자가 된 채 혁신이 되었을 시도는 또 하나의 잡무로 돌변하고 만다. 그렇게 조직은 고인 물의 모습으로 굴러간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심리는 조직이나 사회에서 앞서 나가는 이를 ‘나락’ 보내려는 모습들로도 관찰된다. 이때 사람들은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남의 불행을 보았을 때 기쁨을 느끼는 심리라는 독일어)를 느끼기도 한다. 서강대 이철승 교수는 이 현상의 근원을 쌀농사에서 찾기도 한다. 표준화된 공동 노동을 해야 일이 진행되기에, 치고 나가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이런 한국적 발목 잡기의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비유가 고속도로 1차선 정속 주행이다. 1차선은 본래 가장 빠르게 추월할 차량을 위한 차선이지만, 한국 도로에서는 제한 속도만 지키면 그 차선을 계속 달려도 된다고 여기는 운전자가 많다. 느리게 1차선에 눌어붙어 뒤따르는 빠른 차량들을 가로막는 모습이다. 비켜 주지 않으니 뒤차들은 추월을 못 하고 줄줄이 밀리는데, 법적으로 2차선 우측 추월은 금지되어 있다. 난감한 상황이다. 이렇게 되면 앞에는 텅 빈 공간이 남는다. 느린 1차선 정속 주행 차량으로 뒤 차들은 차례로 브레이크를 밟으며, 긴 유령 정체가 형성된다. 2차선짜리 고속도로에서는 저속으로 달리는 트럭을 아슬아슬 추월하려는 느린 트럭이 1차선을 수 분간 점유하기도 한다.

지난 1일 오후 3시쯤 중부고속도로 상행선 일죽IC 근처에서 흰색 카니발 승용차가 추월 차로인 1차로를 정속 주행하고 있다. 중부고속도로 상행선 일죽IC 근처에서 흰색 카니발 승용차가 추월 차로인 1차로를 정속 주행하는 모습. 도로교통법상 고속도로 1차로는 추월 차량을 위해 비워둬야 한다. /조선일보 DB


본인은 더 빨리 갈 생각이 없지만, 누구라도 나보다 빨리 가는 것은 싫다는 심리다. 뒤에 자리한 이들은 엄청난 스트레스를 느낀다. 가다 서다가 반복되니 연비도 떨어진다. 창문에서 담배 연기가 올라온다. 모두들 그야말로 ‘가속 노화’되는 상황이다. 1차선 정속 주행은 도로교통법 위반임에도 빈번하며, 단순한 매너 문제를 넘어 위험한 우측 추월을 야기하기에 사고 원인이 되기도 한다. 여러 자동차 선진국에서 1차선 정속 주행은 중대한 문제 행위로 강력한 처벌 대상이 될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금기시되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에서는 끼어들기 문제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고 충분히 처벌되지도 않는다.

이 고속도로 상황은 한국 조직과 사회의 축소판이다. 선두에 있는 사람이 앞길이 훤히 열렸음에도 속도를 내지 않을 때, 뒤따르는 사람들은 나아가지 못하고 답답함을 느낀다. 규칙이나 문화 때문에 함부로 앞지르지도 못한다. 결국 선두만 편하게 천천히 갈 뿐, 전체 행렬은 느려지고 뒤쪽은 정체와 불만이 쌓여간다. 그 결과 조직 전체의 발전 속도는 가장 느린 사람에 맞춰지고, 앞으로 치고 나갈 수 있는 잠재력은 활용되지 못한 채 앞이 텅 빈 상태로 남게 된다. 그 텅 빈 공간으로 치고 나갈 수 있는 선진국의 조직들이 수많은 혁신의 시도를 할 때 우리는 멀리서 구경만 할 뿐이다.

어느 순간 발등에 불이 떨어지면, 빠른 추격자 전략을 구사할 수밖에 없어, 사람들은 멀어진 거리를 쫓기 위해 더 과속해야 한다. 그렇게 크런치 모드(crunch mode)에 시달리며, 부실 공사가 만연해진다. 한국 사회, 한국 조직은 모두 나이 들어가고 있다. 조직의 말랑말랑하던 전두엽이 점점 딱딱해진다. 이제 그 답답한 정체를 풀어주어야 할 때다. 그러기 위해 우선, 남의 발목을 잡지 않을 때, 비로소 모두가 함께 달릴 수 있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10/28/UPTCVVFF6VBXBGVULREFHEIB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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