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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한은형의 느낌의 세계] 낯선 여자가 말을 건다 "수박 한 통 사서 반씩 나눌까요?"

한은형 소설가
입력 2025.10.29. 23:45

대용량 음식이나 꽃 등을 함께 사서 나누는 '소분 모임' 유행
목적 이루면 폭파한다… 1~2인 가구 시대의 코리안 스탠더드

일러스트=이철원


처음으로 소분 모임에 대해 들은 것은 만화책을 읽다가였다. 요시나가 후미의 ‘어제 뭐 먹었어?’. 출간되자마자 봤으니 2008년이다. 여기에 소분 모임이 나온다. 변호사인 가케이 시로(남자)와 가정주부인 가요코(여자)가 멤버다. 둘은 소분이 필요할 때는 언제고 약속을 잡는 사이. 입맛이 비슷하지 않으면 소분 모임을 지속할 수 없으니, 대단한 인연이라 하겠다. 둘이 처음 만난 곳은 무더운 여름날의 동네 수퍼마켓. 크고 잘 익은 수박을, 남자는 너무 커서 도저히 살 수 없었다. 남자 옆에서 여자도 수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도 너무 커서 수박을 살 수 없을 거라고 남자가 짐작하고 있는데, 여자가 말을 건다. “수박 하나 사서 반씩 나누지 않을래요?”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에 ‘소분 모임’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느슨한 2인 결속체로, 가깝다고는 할 수 없지만 소소한 일상 정도는 공유하기도 하는 사이. 소분 모임은 요즘 한국 사회에서 쓰이기 시작한 말이다. 대용량의 음식을 함께 사서 나누는 모임이라고 해서 소분(小分) 모임이다. 이를테면, 코스트코에서 대용량 연어를 사서 나눈다. 저울과 칼과 도마, 위생 장갑과 포장 용기를 지참해 소분한다. 아는 사람과 나눌 수도 있지만 모르는 사람과 나누기도 한다. 당근이나 카카오 단체 채팅방에서 만나 약속한 장소에서 접선, 소분이라는 목적을 달성한 후 헤어진다. 목적을 위해 재빨리 뭉쳤다 목적을 이루고 나면 폭파되는 목적 지향형 모임이다.

지난주, 남대문 꽃 시장에서 소분 모임을 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꽃 시장이 있는 3층 상가의 층계참에서 다섯 명이 신문지를 펼쳐놓고 있었다. 장미, 리시안셔스, 메리골드, 석죽 등 어림잡아 열 가지 꽃을 재빠르게 5분의 1씩 나누는 사람들을 보았다. 연어 소분 모임과 달리 꽃 소분 모임은 준비물도 필요치 않아 보였다. 딱 한 송이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꽃들이 있었다. 하지만 꽃 시장에서 그렇게는 안 된다. 꽃집보다 훨씬 싼 대신 최소 구매 단위가 한 단이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세 종류의 꽃을 사서 나오는 길이었다. 계단에서 소분 모임을 하시는 사람들은 대략 1인당 1만5000원 정도로 열 가지 꽃을 가져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참고로 나는 2만8000원으로 세 종류의 꽃을 샀다.

서울 여의도에 있는 ‘더현대 서울’ 식품관 ‘프레쉬 테이블’ 직원이 고객이 구매한 수박을 손질하고 있다. 껍질 처리가 귀찮은 수박 등 과일·채소를 무료로 씻고, 손질해준다. /현대백화점


소분 모임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소분 모임에 참여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소분해서 파는 것을 사는 정도다. 올해 여름 백화점 식품관을 자주 간 것도 그래서였다. 가케이 시로와 가요코처럼 나도 수박 때문이었다. 식품관을 지나다가 우연히 담당 직원이 수박을 소분하는 장면을 본 게 시작이었다. 앞치마와 머릿수건을 한 직원이 눈앞에서 수박을 자르니 수박 매대가 레스토랑의 오픈 주방이 된 것 같았다. 직원은 6분의 1로 자른 수박을 포장한 후, 6분의 1 크기의 수박을 담을 수 있게 특수 제작한 손잡이가 달린 비닐 팩에 넣었다. 눈앞에서 바로 싱싱한 수박을 잘라 깔끔하게 소분하니 사지 않을 수 없었다. 수박 해체 쇼의 효과는 분명했다.

가격은 싸지 않았다. 수박 한 통 가격의 6분의1이 훨씬 넘었다. 하지만 나는 백화점에서 산 소분된 수박의 가격에 불만이 없다. 소분된 수박 가격이, 직원의 인건비와 포장비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수박 스트레스 비용까지도. 수박 스트레스는 여름마다 찾아오는 딜레마다. 거대한 수박을 낑낑대고 들고 가서 반을 자르고, 다시 반을 자르고, 거대한 통들을 꺼내 수박을 잘라 넣는 일은 버겁다. 어찌어찌 잘라 넣는다고 해도 수박을 먹어 치우는 문제가 남는다. 수박은 여간해서 줄지 않기에. 이 모든 게 수박 스트레스다.

그런데 나의 수박 스트레스가 요즘 한국 사회의 보편적 현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024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1~2인 가구가 전체의 65.1%라고 하니 말이다. 통칭해서 1.5가구라고도 하는 것도 들었다. 1.5가구가 평범한 보통의 가구라니, 8인 가족이었던 나는 신기할 따름이다. 소분 모임 같은 말이 뉴노멀을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현상이 있으니 새로운 말도 생긴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뉴노멀이 필요하다. 20~30대 1.5가구만큼이나 60~70대 1.5가구도 많기에 하는 말이다. 모두가 소분 모임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소분한 제품들이 나와야 한다. 소분은 이제 곧 코리안 스탠더드가 될 것이다. 1.5가구 시대에 수박 한 통은 지나치게 무겁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도 무겁고 당 수치로도 무겁다.

백화점과 대형마트 등에서 고객이 산 수박을 손질해 용기에 담아주는 서비스가 유행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10/29/OUUEOI3GKBHKPONOPZ4Q6IOIWY/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