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영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입력 2025.11.17. 23:34
동양의 모스크바에서 '쭉정이' 나그네 인생들의 진열장으로
뿌리 잃고 사라지는 모든 것을 향한 안타까운 사랑의 행로
안중근 의사도, 731부대도, 곧 다가올 한겨울 빙등 축제도 아니다. 식민지 시대의 낭만 도시 얘기다.
“벌써 십 몇 년의 세월이 흘렀던가. 아침저녁으로 만나면 투르게네프니 체호프니 도스토옙스키니 또 누구누구 하며 러시아 문학에 심취하여, 서로 이야기가 끝날 줄을 모르던 그때의 우리. 우랄산 저편의 모스크바는 몰라도 ‘극동의 모스크바’라는 하얼빈만이라도 보고 싶다고 노상 입에 거품을 물고 뒤떠들던 그때의 우리. 형과 같이 하얼빈의 러시아 거리로, 달밤의 쑹화강 변으로 또 카바레로 끽다점으로 발 가는 대로 산책하며 러시아적 이국 정취를 어느 정도까지 맛볼 수 있는 것은 또한 유쾌했다. 당년의 로맨티시즘이 흘렀던 것이다.”

1937년 당시 조선일보 특파원 신분으로 만주를 취재했던 홍종인 선생 글 제목이 바로 ‘애수의 하얼빈’이다. 한적한 강변 어촌에서 러시아풍 모던 도시로 변신한 것은 시베리아 횡단철도 연장선인 동청철도가 건설되면서다. 혁명과 내전을 거치면서는 백계 러시아 망명 사회의 중심지로서 ‘동양의 모스크바’, 심지어 ‘동양의 파리’라는 별명까지 얻었으나, 일본이 점령한 1932년 이후에는 퇴폐적인 향락 도시로 전락했다. 러시아인의 몰락기인 이 시기가 동양인에게는 하얼빈 붐의 절정기다.
동양이 서양을 소유하게 된 환상적 공간이다. 여행객은 호텔 모데른(Moderne)에 묵으며 키타이스카야 거리를 활보하고, 카페와 카바레를 드나들고, 러시아인 별장촌과 묘지를 정탐하고, 동양 최고의 추린 백화점에 들른다. 카페 여급, 카바레 댄서, 늙은 보이, 아코디언 켜는 맹인 거지, 뒷골목 매춘부 할 것 없이 백계 러시아인 일색인데, 다들 몰락한 귀족 출신이라는 설이다(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지만). 그래서 초라한 신세에도 ‘노블’해 보인다. 일본 식민지나 다름없어진 국제도시에서 왕년의 러시아 제국 시민이 신흥 제국의 자본과 힘과 욕망에 종사한다. 이효석 단편 ‘하얼빈’만 읽어도 단번에 이해될 풍경이다.
그런데 왜 애수의 하얼빈인가? 러시아 애호가 이효석은 하얼빈을 직접 가보았고, 백계 러시아인에 관한 글도 여러 편 썼다. ‘벽공무한’이라는 장편소설에서는 하얼빈에 온 조선인 주인공과 백계 러시아 카바레 댄서를 아예 국제결혼도 시켰다.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피보다 진한 ‘쭉정이 계급’의 결속력 덕분이다. 쭉정이는 쭉정이끼리만 피차 구원하고 결합할 수 있기에, 나라 잃은 러시아인과 조선인은 서로를 비추며 서로를 위무한다. 하얼빈의 애수는 상실감과 그리움에 젖은 약자들의 자기 연민이다.
꼭 나라를 잃지 않았더라도, 뿌리 잃고 휩쓸려 부유하는 현대의 가벼움은 애수를 자아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의 소설 제목) 같은 거다. 근대기 여행객들이 느낀 애수의 공통분모도 그것이었을 테고, 오늘의 애수도 그것이다. 나라를 빼앗겼건, 젊음을 흘려보냈건, 또는 소중한 무언가를 잃었건, 제자리에 잘 있던 것이나 응당 제자리에 잘 있으리라 믿었던 것이 사라지며 급변하는 과도기적 하루하루는 실존의 근원을 뒤흔든다. 마음 둘 곳 모른 채 갈팡질팡하는 그 삶이 곧 물 위에 둥둥 뜬 쭉정이의 삶이다.
홍종인 선생 ![]() |
이효석 ![]() |
하얼빈 ![]() |
벽공무한 ![]()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
이효석은 하얼빈을 연거푸 두 번 찾았는데, 두 번째 여행은 유쾌하지 않았던 듯하다. 바로 직전에 부인과 사별한 탓도 있겠으나, 도시가 어느새 또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낡고 그윽한 것이 점점 허덕거리며 물러서는 뒷자리에 새것이 부락스럽게 밀려드는 꼴 (...) 이 위대한 교대의 인상으로 말미암아 하얼빈의 애수는 겹겹으로 서리워 가는 것”이라고 썼다. 애수는 모든 명멸하는 것을 향한 안타까운 사랑의 무력감이다.
얼마 전 나도 하얼빈을 다녀왔다. 러시아의 자취는 남았어도, 완전히 방치되거나 완전히 관광 상품화되었다. 철도 시대 러시아인 책임자였던 대부호의 저택은 혁명가 기념관이 되어 있다. 모택동이 소련 가는 길에 그곳에서 하룻밤을 잤다 한다. 그가 잔 침대와 혁명 역사는 잘 보존되었다. 시대의 대표 건축물인 성 소피아 성당 주변은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온통 ‘소피 공주’ 분장하고 사진 찍는 촬영 무대다. 유일하게 아직도 정교 예배가 열린다는 성모 교회에 가봤더니 희미하게나마 러시아인 혈통이 엿보이는 할머니들이 몇 있다. 러시아어는 하지 못한다. 하바롭스크에서 여행 왔다는 러시아 여자가 내게 ‘코리아’ 찬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 사라져 버린 것의 단서를 애타게 찾아 헤매는 것은 나 혼자뿐이다. 애수의 하얼빈이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11/17/357UIJXW7VAOJNRS5VAZP77PFE/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
'일러스트=이철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만물상] K조선 불굴의 도전 (0) | 2025.11.25 |
|---|---|
| [단독] 코스피 믿었던 개미들, 눈물의 반대매매…5개월간 4300억원 강제 매각 (1) | 2025.11.25 |
| [만물상] 혜산 (0) | 2025.11.18 |
| "고사장에 폭발물" 글에 발칵...붙잡힌 중학생 "장난" (0) | 2025.11.18 |
| 北 공작원 지령 받고 진보 진영 동향 보고... 법원, 1심서 징역 5년 (1) | 2025.11.13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