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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16세 때부터 설악산에 짐을 지고 날라… 난 다른 산을 올라가 본 적 없어"

최보식이 만난 사람

"16세 때부터 설악산에 짐을 지고 날라… 난 다른 산을 올라가 본 적 없어"

 

입력 : 2013.12.16 02:37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2/15/2013121502360.html

 

[지게일로 번 돈으로 이웃 돕는… '설악산 지게꾼 40년' 임기종]


"정말 보잘것없이 살아온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뭔가 할 수 있고
칭찬도 받을 수 있단 걸 알았어요… 남 도우면서 삶에 자신감 생겼죠"


"산을 하루 서너번 펄펄 날았죠, 한창 땐 230kg까지 지고 올라…
흔들바위 앞 매점에 있는 130kg 냉장고도 내가 올렸죠"


낡고 허름한 등산복을 입은 임기종(55)씨를 만난 장소는 설악동 매표소 앞이었다. 키가 160cm도 안
돼 보였다. 머리숱은 듬성했고, 이빨이 거의 빠지거나 삭아서 발음이 불분명했다.


"처음에는 지게를 지는 요령을 몰라 작대기를 짚고 일어서다가 넘어지기 일쑤였지요. 너무 힘들어 몇
번이나 그만둘 생각도 했죠. 하지만 배운 게 없고 다른 재주가 없으니 육체일밖에 할 것이 없었어요.
그때는 내 몸뚱이 하나 살아내는 것도 쉽지 않았지요."


그는 설악산 지게꾼이다. 열여섯 살 때부터 설악산에서 짐을 날랐다. 당시 설악산 지게꾼 동료들은
대여섯명쯤 됐고, 그가 가장 어렸다.

 

△임기종씨는

“사람들은 한푼이라도 더 쌓으려고 하지만 죽은 뒤에 재물은 갖고 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설악산=최보식 기자


―함께 일하던 다른 분들은?


"그분들은 오래전에 다들 그만뒀고, 나만 유일하게 해요. 햇수로 치면 꼭 40년째죠. 나보다 설악산을
더 많이 오른 사람은 없을 겁니다. 매일 오르지만 지겹다는 마음은 없어요. 철마다 설악산의 풍경은
바뀌니까요. 그러니 고맙지요."


그는 이날 흔들바위의 계조암까지 짐을 날라주기로 돼있는데 지게를 메지 않았다. 내가 묻자, 그가
뭐라고 얘기했지만 잘 알아듣지 못했다.


설악동에서 흔들바위로 향하는 진입로는 평탄했다. 차량도 다닐 수 있게 닦여있었다. 그런 길을 20분
쯤 걸었을 때, 그는 길섶의 작은 공터로 들어갔다. 거기에 그의 지게와 LPG가스통이 놓여있었다.


"우선 이 가스통을 저 위에 산채음식점에 갖다줘야 해요. 옛날에는 산길이 닦이지 않아 입구서부터
모든 걸 짊어지고 옮겼어요. 이제는 차가 여기까지 들어와요. 이렇게 짐을 부려놓고는 절이나 매점,
산장에서 내게 연락이 와요. 어디까지 올려달라고. 그래서 지게를 여기에 놓아두죠."


그는 지게에 가스통을 올린 뒤 끈으로 묶었다. 내가 져보려고 했지만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아서 멈
췄다.


"지게를 지는 데는 힘보다 요령이 필요해요. 내 몸무게가 57kg인데 한창 젊었을 때는 혼자서 최고
230㎏까지 져본 적도 있어요."


―작은 체구에 잘 믿기지 않는군요.


"하드와 음료수를 넣는 영업용 냉장고는 130kg이 넘어요. 그걸 몇번이나 지고 날랐어요. 지금 올라가
는 흔들바위의 매점에 있는 냉장고도 내가 올렸죠. 요즘에는 나이가 들어 대개 40kg 무게만 져요."


그는 지게를 진 채 잰걸음으로 올라가면서, 슬쩍 자기 자랑을 했다.


"정말 산을 펄펄 날아다녔어요. 설악동에서 대청봉까지 짐을 메고 대여섯시간 만에 올라갔으니까요.
요즘에는 그럴 일이 없어요. 대청봉 휴게소나 소청산장에 쓰는 물품은 헬리콥터로 떨어뜨려요."


그는 조실부모했다. 열 살이 갓 넘었을 때 부모가 연달아 세상을 떴다. 원래 빈한한 집안에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았다. 그는 6남매의 셋째였다. 이 남매들은 제각기 자기 입을 해결해야 했다. 초등학교 5
학년도 못 마친 그는 남의 집 머슴살이를 두 번이나 했다. 그러다가 설악산 지게꾼이 된 것이다.


―환경만 좋았다면 전문 산악인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요.


"산악인들이 합숙훈련할 때 자일이나 물품을 날라주곤 했어요. 암벽 등반 기술은 못 배웠지만, 나도
전문 산악인 못지않게 산을 잘 탔고 체력도 좋았지요. 한번은 산장 공사를 위해 산악구조대원들과 함
께 짐을 지고 오른 적 있는데 다들 나를 못 따라왔어요."


―산악인 사고를 접한 적도 있습니까?


"구조대와 함께 조난 현장에 간 적은 몇 번 있어요. 암벽을 타다가 떨어져 죽은 사람도 봤고. 한번은
소청산장까지 짐을 날라다 주고 내려오는데 한 등산객이 비스듬히 앉아 있어요. 날이 어둑해졌지요.
다리를 다쳐 꼼짝 못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지게에 지고 내려온 적이 있어요."


―이 지게로 사람도 질 수가 있군요.


"흔들바위의 계조암에서 불공을 드리고 싶은데 몸이 불편해 못 올라가는 중년 여성을 지게에 태워
올려다 준 적이 있지요. 당시 편안했는지 지게 위에 앉아서 휴대폰 통화를 하는 등 용무를 봤어요. 지
나가는 등산객들이 이 광경을 보고는 '지게를 짊어진 사람의 고생은 생각지도 않고…' 하면서 혀를 찼
어요. 사실 나는 크게 힘들지는 않았어요."


―짐을 지고 가다가 구르거나 사고 난 적은 없지요?


"가스통을 짊어지고 가다가 절벽에 미끄러졌는데 별로 다치지 않았어요. 얼굴만 살짝 까졌고. 부러지
는 사고가 있었다면 여태 이 일을 못 하고 있겠죠."

 

흔들바위 앞 매점에서.


―이렇게 짐을 올려주는 데 얼마를 받습니까?


"여기서 흔들바위까지(3.4㎞ 남짓)는 기본 40kg에 2만원이지요. 60kg이면 3만원이 되고. 울산바위까
지 올라가면 요금은 두배가 됩니다. "


―한 번 올려주고 내려오면 두세시간 걸릴 텐데 요금이 2만원이면…. 단가를 누가 책정합니까?


"내가 정하죠. 너무 많이 받으면 내가 마음이 편치 않고, 주위에도 인심을 잃어요. 다들 아는 사람인
데요. 짐을 올려주는 경비는 받지만, 내려올 때 그쪽에서 부탁하는 심부름은 그냥 해줘요."


―하루에 몇번 오갑니까?


"서너번까지 왕복할 때도 있지요. 새벽 일찍 시작해 밤늦게까지도 합니다. 워낙 익숙해 밤길이라도
잘 다녀요. 요즘처럼 겨울에는 일이 별로 없어요. 오늘은 한 번뿐입니다."


그는 지고 온 가스통을 산채음식점에 내려놓았다. 그런 뒤 제설장비를 다시 지게 위에 묶고 흔들바위
를 향해 올라갔다. 경사진 산길에서 그의 숨소리가 들렸다. 이마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오늘 하루 수입은?


"가스통을 음식점까지 날라주고 1만원, 이제 제설장비는 암자에서 2만원을 받아요."


―요즘 한 달 수입은 대략 150만원이 넘지 않겠군요.


"남들에게는 그 돈이 별것 아닐지 몰라도 내게는 많아요. 정말 충분해요."


―언제까지 이 힘든 지게일을 감당할 수 있다고 봅니까?


"잘하면 10년은 더 할 수 있을 겁니다."


―노후를 위해 저축도 해야 할 텐데.


"아내가 장애인이어서 정부의 생활비 보조를 받아요. 내가 술 마시거나 헛되게 쓰는 게 없으니, 그걸
로도 먹고살 수 있어요. 내가 지게를 져서 번 돈은 남는 거죠. 그러니 생전에 남들을 도울 수 있는 거
죠. 사람들은 아등바등 한푼이라도 더 쌓으려고 하지만 결국 죽은 뒤에는 재물은 갖고 갈 수가 없어
요."


그를 만나러 온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힘들게 지게일을 해서 번 돈을 자신을 위해 비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십수년째 장애인학교와 장애요양시설에 생필품을 지원해왔고, 주위의 독거노인
들을 초청해 국내 효도관광이나 위안잔치를 하는 데 써오고 있다.


이런 선행이 알려져 그가 상(賞)을 받게 됐을 때도 그랬다. 그는 '2005년 MBC 및 강원도 봉사대상'의
상금 800만원으로 불우 독거노인 20명에게 2박 3일 제주도 효도관광을 시켜줬고, '2007년 대한민국
봉사 대상'의 상금 1000만원도 그렇게 내놓았다.


―부인이 뭐라고 얘기하지 않습니까?


"아내는 내가 하는 대로 따라옵니다. 정신지체이거든요."


그러면서 농인지 진담인지 이렇게 표현했는데, 진담처럼 들렸다.


"높으신 나라님도 자기 마음대로 못 하잖아요. 보좌관이니 참모들의 간섭을 받잖아요. 나는 결혼해서
아내 간섭을 안 받으니, 이런 행운이 어디 있나요."


젊은 날 그는 한 지게꾼 선배로부터 정신지체 2급에다 걸음걸이도 불편한 여성을 소개받은 것이다.
"이런 여자는 자네와 살림을 살아도 결코 도망가지 않을 것"이라면서.


"아내는 일곱 살짜리 지능쯤 되죠. 이런 여자를 소개해준 것은 내가 별 볼일 없어서 그랬겠지요. 어쨌
든 딱 보는 순간 어찌나 애처롭던지요. 저런 몸이니 얼마나 구박을 많이 받았을까, 내가 돌봐줘야겠
는 마음이 들었어요. 하지만 처가에서는 '딸을 데려가서는 곧 버릴 것'이라며 결혼을 승낙하지 않았
어요. 우여곡절 끝에 스물다섯 살 되던 해부터 같이 살게 됐어요."


―마음은 그랬지만 실제 살아보니 괜찮나요?


"처음에는 대화가 잘 안 돼 답답했지요. 여러 잡념이 들었어요. 하지만 이게 내 팔자라고 받아들였어
요. 무엇보다 내가 돌보지 않으면 이 사람은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말이 어눌하고 걷는 것도 어
려우니 대부분 집 안에서만 지내죠."


운명은 오랜 세월 그에게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부부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하지만 아들은 말을
못했고 더 심각한 정신장애 증세를 보였다.


"아이를 뒤치다꺼리하려면 내가 일을 그만둬야 하는데, 그럴 형편이 안 됐어요. 열세 살이 됐을 때 결
국 강릉에 있는 시설에 맡겼어요. 그렇게 데려다 주고 떠나오는데 '나만 편하려고 그랬다'는 죄책감
들었어요. 용달차에 과자 20만원어치를 싣고서 다시 시설에 갔어요. 그걸 먹으며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니 내가 기뻤어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나도 기쁠 수 있구나, 그때부터 지게일로 번 돈을
그렇게 쓰게 됐어요."


―연봉이 수억ㆍ수십억원이 되거나 부모 잘 만난 부자들조차 기부는 어려운데, 제 육신으로 뼈 빠지
게 고생해서 번 돈을 남을 위해 쓰는 게 아깝지 않나요?


"천만에요. 나는 정말 보잘것없는 삶을 살았어요. 그런 내가 남들을 위해 뭔가 해줄 수 있고, 나도 칭
찬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방송에서도 몇번 나왔어요. 언젠가 길에서 속초 시장님도
나를 알아보고서 먼저 악수를 청했어요. 남을 도우면서 내 삶에 자신감을 가졌어요."


흔들바위 계조암에 짐을 부려놓자, 암자 주지로부터 "내일 새벽 다섯시에 염화칼슘 포대를 올려 보내
달라"는 주문을 받았다. 이날 운임 2만원을 받고 빈 지게로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도중에 산
채음식점 주인들이 "오빠, 물 마시고 가라"며 아는 체했다.


―설악산 말고 어느 산이 좋던가요?


"설악산에는 40년 동안 오르락내리락하지만, 설악산 말고 다른 산에는 여태껏 올라가 본 적이 없어요."


내 차로 속초 시내에 있는 그의 13평형 임대 아파트까지 함께 갔다. 승용차에 탄 것이 어색한지 그는
손을 모으고 있었다. 집 안으로 따라 들어가니 아침에 먹었던 고등어구이가 프라이팬에 그대로 있었
다. 그의 부인은 낯선 방문객에게 웃었다.

 

최보식  |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