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러스트=이철원

[박해현의 문학산책] 詩에서도 여성이 대세다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입력 2019.06.20 03:12


한국 문단에선 여성시(詩)를 남성 관점에서 구분하는 용어가 농반진반(弄半眞半)으로 통용되기도 한다. 여성 시인을 성녀(聖女)와 마녀(魔女)로 나누는 것이다. '어머니'와 '누이', '소녀' 이미지를 노래한 여성시는 성녀 계열에 들어간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앞세우거나 과감하게 언어 실험을 시도하는 여성시는 '문학의 마녀'로 꼽힌다. 우스갯소리이기도 하지만, 은근히 비평의 잣대로 작용하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김혜순(64) 시인은 '마녀' 중에서도 고참 마녀다. 1979년 등단 이후 기존 여성시에서 보기 힘들었던 언어 실험을 바탕으로 여성의 삶을 악몽의 환상적 이미지로 묘사해 주목받아 왔다. 여성의 몸에 갇힌 여성의 실존을 광기 어리거나, 신들린 언어로 고발했다. '화장을 지우고 나자 구멍이 걸어 들어왔다/ 나는 소파에 앉아 팬티스타킹을 벗으며/ 그 구멍을 바라보았다/ 일 미터 육십 센티 정도의 구멍이었다/ 구멍은 밥도 잘 짓는다 하고/ 구멍에서 아기가 튀어나온 날도 있다 했다/(중략)/ 아침에 일어나면 구멍이 흘린 눈물인지/ 베개 위에 얼룩이 조금 번져있다.'(시 '구멍' 중에서)

김혜순 시인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이 유난히 심한 한국에서 여성시의 특징은 '마녀'보다는 차라리 '유령'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하다"고 냉소적으로 말해왔다. 여성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 유령 취급을 당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여성 시인이 '구멍'을 말하면, 덜떨어진 남성 독자들이 쉽게 오해하기 때문에 시인의 속뜻은 '유령'처럼 헛돌게 된다. 김혜순 시집은 파격적 언어 사용 때문에 상식을 넘어선 '유령'처럼 난해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여성 시인 상당수가 김혜순 시학(詩學)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자랐다. 평론가 이광호는 요즘 여성시의 경향을 가리켜 '김혜순 공화국'이라고 했다.


이처럼 여성적 실험시의 대모(代母)로 꼽히는 김혜순 시인이 지난 6일 캐나다 문학상 '그리핀 시 문학상' 국제 부문 수상자로 선정돼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수상작은 2016년에 낸 시집 '죽음의 자서전'이다. 전위 문학을 표방해 온 '문학실험실'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다. 그리핀 시 문학상은 지난 2000년 제정돼 역사가 짧지만, 창작과 번역 각 부문 상금이 6만5000캐나다달러(약 5700만원)인 데다가 수상자도 화려해 이내 권위와 명성을 드높여왔다. 심사위원회는 캐나다에 거주하는 최돈미 시인이 영역한 시집 '죽음의 자서전'에 대해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 시인 김혜순은 49편의 시로 꾸민 마흔아흐레를 노래했고, 날마다 망자는 환생을 기다려야 했다"며 "우리는 샤머니즘과 모더니즘, 페미니즘이 요란스레 충돌하는 김혜순의 예술을 통해 지금껏 아무도 노래하지 않은 저음(低音)을 듣는다"고 평했다.


 

죽음의 자서전               김혜순                             최돈미                         이광호


김 시인은 지난 2015년 지하철 승강장에서 현기증으로 쓰러져 투병한 적이 있다. 뇌신경계의 질병이었다고 한다. 하필이면 메르스 사태와 겹쳐 시인은 병실을 확보하지 못한 채 병원을 전전했다. 개인이 직면한 삶의 위기와 공동체가 겪는 죽음의 사태까지 내면화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49제를 지내듯 49편의 시로 구성된 '죽음의 자서전'에서 바다는 '까만 거울'로 그려졌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이 까만 거울 속에 있고, 그 누가 이 거울을 찍어 우리의 얘기를 쓰게 될까/ 글을 쓸 잉크가 왜 이리 많을까'라고 했다. 세월호 희생자를 연상케하는 화자(話者)를 시인이 대변했다.

까만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시인은 진혼가를 부른다. 까만 거울은 캄캄한 밤의 유리창을 연상케 한다. 삶 너머의 풍경을 보여주는 상징적 까망이다. 시인은 컴컴한 유리창에 죽음을 투사해 삶을 일깨운다. 김혜순은 지하철역에서 쓰러진 날을 떠올리며 '너는 죽은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네 앞에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본다'며 '바깥으로 향하던 네 눈 빛이 네 안의 광활을 향해 떠난다'고 묘사했다. '죽음은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쳐들어가는 것. 안의 우주가 더 넓다/ 깊다. 잠시 후 너는 안에서 떠오른다'는 것이다.

시집 '죽음의 자서전'을 읽고 나면 이런 생각이 든다: 죽음은 마음의 눈을 뜨게 하는 창(窓)이면서, 마음을 아프게 찌르는 창(槍)이다. 그 창으로 쓰는 시는 유령처럼 다가온다. 여성 시인일수록 더 무섭다.

조선닷컴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19/201906190383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