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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박해현의 문학산책] 여성의 펜이 칼의 노래를 부른다

박해현 문학전문기자

입력 2019.02.07 03:12


여성문학 전성시대지난 2년간 문학상 휩쓸어
최근 페미니즘 열풍은 박완서 문학을 다시 호출

요즘 한국 문학의 대세는 여성 소설이다. 2016년에 출간된 조남주의 장편소설 '82년생 김지영'이 오늘의 여성 문제를 부각시켜서 페미니즘 열풍을 일으키더니 지난해 11월에 100만부 판매를 돌파했다. 2007년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가 남성 독자층을 확보해 100만부를 넘어선 것과는 선명하게 대비되는 현상이다.

2년 전부터 문학상 선정 과정에도 여풍(女風)이 거세게 불었다. 2017년 동인문학상 수상자 김애란을 비롯해 그해 주요 문학상 수상자의 8할이 여성 작가였다. 지난해 역시 주요 문학상은 여성 작가들에게 돌아갔다. '미투' 운동 이후 여성의 목소리가 사회적 구습(舊習)을 타파해가는 상황에 걸맞게 여성 소설의 전성시대가 열렸다고 한다. 남녀의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비판하는 전문용어 '성 인지(認知) 감수성'이 여성학계나 법정뿐 아니라 기업의 마케팅에서도 새 기준으로 자리 잡는 시대에 문학이 뒤처질 순 없다.

여성 소설의 르네상스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다. 1990년대 초 남성 중심주의를 비판하는 여성 문학이 질풍노도(疾風怒濤)를 형성했다. 김미현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는 연구서 '젠더 프리즘'(2008년)을 통해 90년대 여성 소설을 집중 분석한 바 있다. '사회적 의미의 성(性)'을 뜻하는 '젠더(Gender)'는 어느덧 낯설지 않은 말이 됐다. 김 교수는 "어머니나 아내로서 느끼는 의미보다는 '딸'로서 느끼는 권리를 더 많이 누린 세대의 여성 문학으로 볼 수 있다"고 풀이했다. 90년대 여성 작가들은 여성의 개인적 자유 추구를 성적(性的) 방종으로 몰아가려는 남성 중심주의를 때로는 도발적으로 때로는 냉소적으로 비판해 주목을 받았다.


최근 페미니즘 문학의 경향은 90년대의 개인성에 비해 사회적 성격이 더 두드러진다. 평범한 여성의 일상적 삶이라도 시민사회 전체의 문제와 연관시켜 보려고 한다. 올해 이상문학상을 받은 윤이형의 중편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는 오늘날 30~40대 여성이 겪는 일상의 여러 쟁점을 한 인물에게 쏟아부었다. 한 여성의 존재를 통해 반려 동물 키우기와 청년 실업을 포함한 세태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결혼과 출산·육아를 둘러싼 여성의 고민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페미니즘 문학 열풍은 박완서(1931~ 2011) 문학을 다시 호출하기도 한다. 최근 출간된 정이현의 소설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는 신도시 아파트 단지의 여성 약사(藥師)를 중심으로 중산층의 위선과 학교 폭력을 연결시켰기 때문에 '박완서 소설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란 평을 받았다. 평론가 백지연은 최근에 낸 평론집 '사소한 이야기의 자유'에서 "근대 가부장제 가족 구조 속에서 여성이 자신의 주변부적 위치를 자각하면서 동시에 어떠한 방식으로 시민의 권리와 책임을 깨닫게 되는가에 대한 질문은 문학에서 중요한 주제"라고 했다. 백지연은 그런 여성 소설의 모범 사례로 박완서의 단편 '조그만 체험기'(1976년)를 꼽았다. 억울하게 검찰에 연행된 남편을 둔 소시민 주부이자 작가의 시선으로 전개된 이 소설은 공권력의 맹점을 비판했다. 그런 제도의 결함이 소시민의 이기심과 기회주의에 의해 유지되는 현상을 여성의 삶과 연관시켜 풀어가기도 했다. 법의 타락에 맞서 개인의 양심에 기반한 도덕적 자각도 제시했다. 백지연은 "일상과 정치, 개인과 사회가 어떻게 연동되는가를 예민하게 형상화한 이 작품은 문학에서 요청되는 페미니즘의 시선이 얼마나 세심하고 깊어져야 하는가를 암시한다"고 풀이했다. 지난달엔 박완서 타계 8주기를 맞아 후배 작가 29인이 존경의 뜻을 바친 콩트집 '멜랑콜리 해피엔딩'을 냈다. 남성 작가 김종광은 "20세기 한국 서민, 불우 이웃 여성들의 삶과 생각과 감정을 실록 이상으로 묘파한 다시 없을 사관(史官)"이라고 박완서를 기렸다.

1980년 이후에 태 어나 박완서 문학을 읽으며 자란 여성 작가들이 요즘 문학의 중심에 진입했다. 여성의 삶이 사회적 모순과 병폐의 집하장(集荷場)이 됐다고들 한다. 여성의 몸과 성, 결혼과 이혼, 출산과 양육, 여성의 사회 활동과 노후 생활에 이르기까지 여러 문제가 시대 변화의 속도와 맞물려 있다. 그러다 보니 여성의 펜이 우리 사회의 환부를 급히 도려내는 칼이 되려고 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06/201902060148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