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9.02.02 03:00 | 수정 2019.02.07 10:41
[김형석의 100세일기]
지난주 수요일 오후였다. YTN 녹화실로 안내를 받았다. 방송 촬영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대담을 하던 아나운서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언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을 겪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두 차례 있었는데 첫 번째는 일본에서 대학생 시절 학도병 문제로 고민했던 때"라고 했다. 얘기를 나누던 아나운서가 "글을 읽어 보니까 갈대밭 얘기가 나오는데 그 사건은 언제 어디서 일어났던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두 번째 이야기를 들려줬다.
해방을 북한에서 맞이하고 2년 동안 고향에서 조용히 청소년들을 위한 중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즈음 조선민주당을 이끌어 오던 조만식 선생은 연금되고 함께 중책을 맡았던 김현석은 탈북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노모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고향에 왔다가 체포되었다. 그가 바로 우리 중학교 이사장이었다. 그를 붙잡아 가는 차량을 집 뒤의 산에서 바라보았다. 나를 아들같이 걱정해 주면서 교장직을 다른 이에게 맡기고 탈북하라고 권고해 준 사람이었다. 그 이사장이 어떻게 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1947년 8월 광복절 후에 나는 일곱 달 되는 아들애를 업은 아내와 같이 탈북을 단행했다. 모친은 눈물을 훔치면서 말이 없었다. 부친은 "맏손자 얼굴이나 한 번 더 보자"면서 잠들어 있는 손자의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것이 부친과 손자의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은 몰랐다.
기차로 황해도 사리원을 거쳐 해주까지 왔다. 사건이 벌어졌다. 아내와 나는 용당 바닷가로 가다가 보안서원에게 붙잡혔다. 탈북자 수용소로 끌려갔다. 인계받은 계장이 나를 심문하려고 책상 맞은쪽에 앉았다. 바로 그때였다. 벽 기둥에 걸려 있는 전화벨이 울렸다. "누구 전화받을 이가 없느냐"고 소리 질렀던 계장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그 통화 내용이 내 귀에까지 들려왔다. "저 ○○ 계장입니다." "오늘도 거기에서 탈북하다가 잡힌 놈들이 많은가?" "예, 어제부터 많아지고 있습니다." "지금 막 평양에서 지령이 떨어졌는데 '이제부터 잡혀오는 놈들은 무조건 출발했던 거주지로 감시하에 돌려보내라'는 명령이다." "예, 알겠습니다." 계장은 내 앞자리로 돌아와 앉아서야 그 전화 내용이 떠올랐는지, 잠시 머뭇거리다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보안서원에게 내 아내를 데리고 들어오라고 지시했다. 그러고는 "자네가 이 두 사람을 데리고 기차나 버스정거장까지 가 떠나는 것까지 지켜보라"고 명령했다. 나는 버스정류장에서 보안서원을 설득해 보냈다. 보안서원을 적당히 물리치고 나서 후배 선생이 준 쪽지가 떠올랐다. 함께 교편을 잡았던 그가
내가 고향을 떠나기 전 무슨 예감에서인지 "혹시 필요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제 누님이 해주에 사는데 주소와 전화번호입니다"라며 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 누님 가족의 안내를 받아 다음 날 야반에 바닷가 갈대밭을 지나 바다를 건넜고 탈북에 성공했다.
나는 방송국에서 녹화하며 아나운서에게 말했다. 이런 운명의 길을 헤쳐 오면서 어떤 섭리가 있음을 믿게 되었다고.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01/201902010152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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