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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남정욱의 영화 & 역사] 희생, 인공지능은 따라 하지 못할 인간만의 능력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입력 2016.09.22 03:11


인공지능이 추구하는 건 효율
영화 '마션'의 동료 구출 작전처럼 어이없을 정도 비효율 납득 못할 것
인간의 위대한 점은 매몰된 광부 한 사람을 위해 본 적도 없는 여럿이 목숨을 거는 것

영화 마케팅을 하면서 배운 나쁜 버릇이 효율을 위해서라면 다른 가치를 얼마든지 희생하는 뻔뻔함이다. 이세돌과 인공지능 알파고가 대결한다고 했을 때 내가 구글의 마케터라면 어떤 전략을 썼을까 생각해봤다. 물론 승부를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다. 한 판을 이긴 다음에 다음 판을 내준다? 팽팽함을 포기하는 최악수다. 두 판을 이긴 다음에 한 판을 내준다? 역시 긴장감이 떨어진다. 세 판을 이긴 뒤? 이건 좀 얘기가 된다. 절망을 풍성히 깔아준 후 살짝 희망을 안겨주는 것이다. 네 판을 모조리 이긴 후? 절망 과다로 희망은 빛이 안 난다. 결국 세 판 후다. 실은 참으로 잔인한 가정(假定)이다. 특히 이세돌 9단에게 미안하다.

딥러닝인지 뭔지를 하면서 인공지능은 사실상 생각을 하게 됐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인간에 대한 정의가 200년 만에 깨졌다. 인공지능이 "나도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댓글을 달아버린 것이다. 이제 인간에 대한 정의는 새로 내려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나는 자살한다' 혹은 '나는 착각한다' 정도가 적당하다고 본다. 인공지능과 비슷하게 진화하는 게 로봇이다. 미국의 하이테크 로봇 업체인 보스턴 다이내믹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인간처럼 움직이는 로봇의 등장은 골인 지점 직전이다. 인공지능이 이 로봇에 올라타는 순간 문명의 물줄기가 바뀔 것이다. 미리부터 공포에 떨 필요는 없다. 인간이 가진 고질병이 과다한 인간 중심적 사고와 착각이다. 인간은 자기가 지구의 주인이라고 착각한다. 턱도 없는 소리다. 지구의 주인은 총량으로 보면 식물이고 종의 수로 따지면 곤충이다. 인간은 땅속으로 파고들어갈 수도 없고 하늘을 날아다닐 수도 없다. 인간 기준에서만 인간은 지구의 지배자일 뿐이고 정확히는 영장류의 우등생일 뿐이다. 착각은 이어진다. 현생 인류를 영장류가 진화한 최종 모습이라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인류는 계속 몸 형태를 바꿔왔다. 구부정했던 조상은 고기를 먹으면서 허리를 꼿꼿이 세웠으며, 중세 사람이 보면 의족에 의치에 군데군데가 공산품인 현대인은 프랑켄슈타인이다. 50년 후 인류 모습은 어떨까. 꼴만 지금과 비슷할 뿐 안을 열어보면 철제(鐵製)나 플라스틱이 반도 넘을 것이다. 인간 대 기계라는 대립 구도는 사물을 둘로 나눠 보는 서구 철학의 이분법적 세계관에서 온다. 그러나 싸우고 질투하는 대신 공존이라는 개념도 있지 않은가. 뇌는 인간이고 몸은 기계이거나 그 반대거나. 어쩌면 현생 인류 역사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생각하는 기계로 가는 과정의 일부일지도 모르겠다.

이세돌+알파고, 데카르트, 보스턴 다이내믹스, 프랑켄슈타인


영화에 등장하는 인공지능은 두 종류다. 인간에게 상처받는 인공지능과 인간에게 상처를 주는 인공지능. 초반에는 인간이 가해자였고 인공지능이 피해자였다.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와 크리스 콜럼버스의 '바이센테니얼 맨'이 대표적이다. 이게 역전된 게 '터미네이터'를 시작으로 그 절정인 '매트릭스'다. 처음에는 기특했던 인공지능이 슬슬 무서워지기 시작하는 경로다. 그런데 피해자 '블레이드 러너'보다 한참 전에 인공지능이 뒤통수를 치는 영화가 있었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다. 1968년에 나온 작품인데 50년이 다 돼가는 지금도 줄거리가 뭔지 아는 사람이 없다(안 보셔도 된다는 얘기다). 그 영화에서 인공지능은 인간을 배신하고 죽이고 심지어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한다.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인공지능이 무서웠던 건 그 지능이 추구하는 효율이다. 그 계산은 너무나 명료해서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러나 효율만을 추구하는 사회에 인간이 설 자리는 없다.

 

리들리 스콧 + 블레이드 러너 2019, 블레이드 러너 2049, 크리스 콜럼버스 + 바이센테니얼 맨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 3 Rise of then Machines, 4 미래전쟁의 시작, 5 제니시스


매트릭스, 2 리로디드, 3 레블루션


   

스탠리 큐브릭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맷 데이먼 + 마션, 카뮈


효율 측면에서 보면 데이먼이 나오는 '마션'은 정말 어이없는 영화다. 한 줄로 줄이면 '화성에서 농사짓기' 혹은 '천막 뒤집어쓰고 화성 탈출하기'인데 인간이 얼마나 비효율적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 참 영화적으로 보여준다. 맷 데이먼이 화성에서 삼시 세끼를 하는 동안 지구로 귀환하던 동료 다섯이 그를 구하러 되돌아온다. 중간에 보급선과 못 만나도 죽는다. 지구 중력 가속 비행을 못 해도 죽는다. 모든 상황이 완벽해도 지구 귀환일이 533 늦춰진다. 효율 제로가 아니라 마이너스 오백도 넘는다. 악재란 악재는 다 쏟아지는 상황을 뚫고 그들은 동료를 우주선에 태우는 데 성공한다. 카뮈가 그랬다. 인간의 위대한 점은 매몰된 광부 한 사람을 위해 본 적도 없는 여러 사람이 기꺼이 목숨을 거는 거라고. '마션'은 카뮈가 말한 것의 우주 확장판이었다. 그래서 인간인 나는 인공지능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너네 그거 되냐? 우린 돼. 아니, 해!"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9/21/201609210355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