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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가슴으로 읽는 시조] 추청(秋晴)

정수자 시조시인

입력 2016.09.02 03:09



추청(秋晴)

필시 무슨 언약이 있기라도 한가부다
산자락 강자락들이 비단 필을 서로 펼쳐
서로들 눈이 부시어 눈 못 뜨고 섰나부다.

산 너머 어느 산마을 그 언덕 너머 어느 分校
그 마을 잔치 같은 운동회 날 갈채 같은
그 무슨 자지러진 일 세상에는 있나부다.

평생에 편지 한 장을 써본 일이 없다던 너
꽃씨 같은 사연을 받아 봉지 지어 온 걸 봐도
천지에 귓속 이야기 저자라도 섰나부다.

정완영(1919~2016)






한국적 가락으로 한국적 정서의 경계를 높여온 시인. '비단 필'에 '갈채'까지 얹던 가을을 두고 떠났다. 일찍이 '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조국')로 벌거숭이 조국을 '줄 고르'더니 '내 고향 하늘빛은 열무김치 서러운 맛'('고향 생각')으로 집 떠난 마음들을 울렸다. 그 '손'에 닿으면 이 땅의 숨탄것들 은 서러운 하늘을 열고 수척한 소리를 얻고 그리움의 깊이를 앓았다. 그런 굽이마다 그린 김천 선영에서의 첫 가을. 김천(金泉)의 '백수(白水)'('泉'을 풀어 지은 호)로 돌아갔으니 별들도 갈채를 보내리. '한국시의 종가(宗家)'라던 시조 한생에 '눈이 부시어' 하늘도 더 푸르리. 게서도 지상의 귓속 이야기로 꽃씨 봉지 하마 지으실까…

정완영 시인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9/01/201609010382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