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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ESSAY] 사랑과 이별, 그리고 초콜릿

방귀희 한국장애예술인협회 대표

입력 2016.08.31 03:08

 

대학 시절 어느 남학생이 건네준 당시엔 흔치 않던 달콤한 초콜릿
뒤늦게 사춘기 짝사랑 열병 앓아… 알고 보니 그는 초콜릿 예찬론자
특별히 날 위한 것이 아니었는데 달콤쌉싸름한 이별 같은 여운이…

 

요즘 연일 다크 초콜릿의 효능에 대한 정보가 내 귀를 자극한다. 심혈관 질환 개선, 피부 노화 방지 효과로 나를 유혹한다. 이 초콜릿 뉴스에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내 젊은 날의 사랑 같지 않은 사랑이 떠올랐다. 나는 장애인에게 가장 친절하지 못하던 시절인 1970년대에 대학 생활을 하였다. 강의실이 보통 5층, 7층. 휠체어를 사용하는 나로서는 너무나도 높은 산이라 한번 올라가면 내려오지 못했다. 점심을 먹으러 그 산을 내려온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친구들은 삼삼오오 짝지어 학교 식당에 가고, 좀 더 여유 있는 아이들은 학교 앞 음식점으로 발길을 옮겼지만 나는 빈 강의실에서 혼자 책을 읽었다.

엄마가 도시락을 싸 주긴 했지만 도시락을 먹지 않고 그대로 가져갈 때가 많았다. 엄마한테는 "입맛이 없어서"라고 말했지만 난 텅 빈 교실 한쪽에서 식은 도시락을 먹는 내 초라한 모습을 휠체어에 보태고 싶지 않은 자존심에 배고픔을 참았다.

"이거…." 우리 과 남학생이 나에게 내민 것은 초콜릿이었다. 당시는 초콜릿이 요즘처럼 흔하지 않았다. 지금도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 선물을 하지만 그때 TV에서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수줍게 초콜릿을 건네는 광고가 히트 치고 있어서 남학생이 주는 초콜릿을 선뜻 받지 못하고 있었다. "자…." 그 아인 좀 더 적극적으로 눈짓까지 하였다. 그렇게 받아 쥔 초콜릿 한 조각을 입에 넣었을 때, 내 입안에서 녹아나는 달콤함은 끈적거림과 함께 가슴을 뛰게 했다. 그 초콜릿 때문에 나는 뒤늦게 사춘기 열병을 앓았다.

초콜릿으로 친해진 그 아인 결국 내 여학교 동창과 결혼했다. 중증 여성 장애인의 결혼을 법률로 규제해놓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는 불법보다 더한 금기였다. 나는 그런 사회적 방해로 나의 초콜릿 사랑이 미완으로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아인 아무런 잘못이 없고 그 아인 여전히 나에게 초콜릿을 건네주던 때의 그 마음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었기에 결혼 후 친구의 남편이라는 명분으로 종종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 친구 집에서 모임이 있던 날이었다. 친구의 남편,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여 나의 초콜릿 사랑이 퇴근하여 집으로 들어왔다. "아빠~!"라고 외치며 아기가 달려가자 그는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내 아기의 작은 손에 쥐여 주었다.


'저 초콜릿은 내 건데…' 싶어서 복잡한 심정에 맥박이 빨라지고 있을 무렵 천둥이 쳤다.

"여보! 또 초콜릿이야? 당신 때문에 우리 애 이 다 썩겠어."

"초콜릿이 얼마나 좋은 식품인데, 당분 때문에 피곤도 풀어주지, 기분도 좋아지지. 어디 그뿐인가? 비상시 식량 역할까지 하는데…."

'헐!' 그는 초콜릿 예찬론자였던 것이다. 그가 나한테 준 초콜릿은 비상식량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점심을 먹으러 함께 가지 못하는 장애인 친구를 위해 착한 그가 가장 간편하게 허기를 잠재울 수 있는 초콜릿을 가끔 사다 주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의 짝사랑은 초콜릿으로 시작해 10년 후 바로 그 초콜릿 때문에 끝났다.

그날 이후 나는 초콜릿과 멀어졌다. 그저 무식하게 달기만 한, 강아지 똥보다 못한 검정 덩어리로 여기고 방치했다. 그런데 요즘 다시 초콜릿이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지금 나한테 가장 필요한 것은 심혈관 질환 개선이기 때문이다. 이미 소아마비로 팔다리가 다 마비된 상태이지만 뇌졸중으로 2차 장애가 또 발생해 나한테 남아 있는 유일한 오른손마저도 못 쓰게 될까 봐 늘 불안하다.

그 불안증 때문에 응급실에 간 적도 있다. "여기서 더 이상 망가지면 안 돼요. 빨리 조치해주세요"라고 다급한 호소를 하자 간호사는 혈압이 정상이라고 핀잔을 주었다. 이 불안은 나만의 건강염려증이 아니다. '2014 장애인 실태 조사'에 의하면 장애인의 77.2%가 만성질환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을 정도로 장애인의 건강권은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나도 예외는 아니기에 몸에 좋다면 뭐든지 시도해본다. 대단한 사랑과 이별은 아니었지만 달콤하고 쌉쌀한 여운 때문에 애꿎은 초콜릿만 싫어했었는데 이제 사면해줘야겠다.

'좋아. 사 먹자.' 그러면 짝사랑의 위험도 없고 따라서 이별도 없을 테니 안심이다. 그런데 그런 안심이 왠지 서글퍼진 다. 그 시절처럼 초콜릿 하나에 내 심장이 뛰지 않을 것 같아서 자기 합리화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니다. 요즘 내 심장은 아무런 자극이 없을 때도 미친 듯이 뛴다. 이건 뭐지? 중년에 찾아온다는 그 사추기인가! 이렇게 로맨틱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누가 알려주었다. 그건 갱년기 증상이라고. 이것이야말로 정말 슬픈 이별 아닌가? 청춘과의 이별.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8/30/201608300332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