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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2030 플라자] 환자가 ‘선생님’이더라

박소진 간호사
입력 2022.10.20 03:00

/일러스트=이철원

병원에서 ‘간호사 선생님’으로 불리지만
늘 주의사항 알리는 말만
결혼·육아 조언부터 삶의 지혜까지
환자들에게 배우는 게 더 많아

나는 병원에서 ‘간호사 선생님’ 소리를 듣는다. 연세 지긋한 어르신한테 선생님 소리를 듣는 것도 처음엔 어색했지만 이젠 꽤 익숙해졌다. 학창 시절 나의 ‘선생님’들은 다양한 지식을 알려주셨다. 나도 선생님이라 불리는 만큼 많은 걸 알려드려야겠지만 교육하는 내용은 정해져 있다. 지금은 투석실에서 근무 중이라 환자들에게 주로 식이 교육을 한다. 투석 환자들은 신장이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에 수분 제한 교육이 특히 중요하다. “물은 많이 마시면 안 돼요. 약 먹을 때도 최소한으로 드세요. 과일이나 야채는 칼륨이 많아서 안 되고요, 김치는 나트륨이 많아서 안 돼요.” 지키기 쉽지 않은 것을 요구하고 매번 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그게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반면 환자들은 내게 정말 다양한 이야기를 해주신다. 어느 젊은 환자는 주식 투자 하는 방법,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머니 같은 나이의 한 여성 환자는 깨끗하게 빨래하는 법, 반찬 만드는 법을 시시콜콜 알려주셨다. 아흔 넘은 노인 환자는 살아오면서 체득한 삶의 지혜를 들려주셨다. 나는 늘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데 그들은 관심과 애정을 담은 말로 대답한다. 가는 말이 그다지 곱지 못한데도 오는 말은 언제나 고와서 감사하다.

물론 환자가 건네는 말에서 처음부터 감사함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는 그 반대였다. 대학 병원에서 근무할 때는 일이 많아 예민했고 환자가 말을 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어쩌다 환자의 말을 길게 듣고 있노라면 고참 선배가 “그렇게 시간이 많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래서 부끄럽지만 환자의 말을 적당히 끊고 필요한 정보만 묻는 게 속이 편했다. 이런 행동이 습관이 되다 보니 혹 여유가 있는 날에도 환자에게 먼저 안부를 묻는 일은 거의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시간적 여유보다는 마음의 여유가 더 없었던 것 같다. 요즘은 예전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으로 환자들과 최대한 많이 대화하려고 한다. 다행히도 지금 근무하고 있는 곳에서는 환자와 대화할 시간이 충분하다. 투석이 끝나면 바늘을 빼고 약 3분간 환자 팔을 직접 지혈해야 한다. 그 잠깐 동안 나누는 이야기를 즐길 줄 알게 됐다.

간호사 일을 시작하면서 지금까지 수많은 환자가 건넨 관심과 따뜻한 말을 거름 삼아 성장해왔다고 생각한다. 신출내기 때는 밥도 못 먹고 일할 때가 많았다. 그럴 때 환자들이 안쓰러워하며 먹을 것을 몰래 입에 넣어주기도 했다. 혹시라도 선배 간호사들이 볼까 봐 침대 옆에 있는 커튼을 쳐주거나 망을 봐주기도 했다. 사회생활에 잘 적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언도 많이 들었다. 요즘은 결혼했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 편이다. 결혼과 출산에 대해 궁금한 것을 내가 먼저 묻기도 한다. 부모님에게도 묻기 어려운 질문을 편하게 받아주고 본인 경험을 이야기해 주신다. 기혼인 선배·동료들은 주로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환자들과 나누는 듯하다. 환자와 간호사는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서로 보살피고 함께 성장하는 듯하다. 많은 위로가 되고 살아가는 데 큰 자양분이 된다.

예전에는 환자들이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니 내가 그들을 일방적으로 돌보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환자의 중증도가 높았던 대학 병원 근무 시절이나 담당 환자가 60명이 넘던 요양 병원 근무 시절에는 업무 부담이 커서 내가 환자에게 받고 있는 긍정적 효과를 느끼지 못했다. 내 나름대로 업무에 익숙해지고 시야가 넓어지면서 내가 환자들한테 간호받고 있고 성장하고 있음을 느낀다.

오늘도 출근하면 ‘간호사 선생님’ 소리를 듣겠지만 내가 제공하는 간호나 의료 지식보다 그들이 내게 주는 애정과 삶의 지식이 더 크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2/10/20/53UG2QLX3JBWJBXC3GTM7CUFQ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