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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자작나무 숲] 동물에 관한 이야기는 왜 슬픈 걸까

김진영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입력 2022.11.22 03:00

 

일러스트=이철원

말을 잔혹하게 죽이는 ‘죄와 벌’, 애견을 강에 빠뜨리는 ‘무무’
러 문학엔 동물 관련 슬픈 이야기 많아… 인간 고통이 반영된 것
동물이 인간을 믿고 의지하는 존재일 때, 이야기는 더욱 슬퍼져

‘아침이면 동물들은 당신을 찾으러 온다. 그들은 그렇게 그들의 애정을 드러내 보인다. 그들의 하루는 사랑과 신뢰의 행위로 시작된다.’

자신의 죽은 개를 그리며 쓴 장 그르니에 산문집 한 대목이다. 똘이도 아침이면 나를 찾아온다. 현관 쪽에서 자다가 인기척이 나면 꼬리를 흔들며 다가온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가 잔다. 간혹 내가 이른 새벽 가만히 일어나 책상 앞에 앉을 때면,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마음 놓고 그냥 푹 잔다. 그때는 내가 똘이를 찾아간다.

동물이 인간을 믿고 의지하는 존재일 때, 이야기는 종종 슬퍼진다. 그들의 하루는 사랑과 신뢰로 시작되는데, 인간은 그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주 배반하며, 그런데도 순직한 동물은 배반하는 인간에게서 신뢰를 거두지 않는다.

러시아 문학에 동물과 관련된 슬픈 이야기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받고 배반당한 인간의 사연이 많고, 함께 슬퍼하며 분노한 작가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19세기 러시아는 1% 귀족 상류층과 80% 농노로 이루어진 전제주의 신분 사회였다. 거칠게 말해, 80%가 인간 대접을 못 받았다. 중간에 낀 소시민 역시 짓눌린 ‘작은 인간’의 비애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인간이 인간을 학대하고, 학대받은 인간이 또 자신보다 약한 동물을 학대하는 폭력의 연쇄 작용 앞에서 작가들은 고개를 돌리거나 눈감아버리는 대신 그 현장에 남아 지켜보았다.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의 명언대로 윤리란 ‘보는 것’의 문제이다(Ethics is an optics).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주인공이 꾸는 악몽을 단적인 예로 들 수 있다. 꿈에서 주인공은 일곱 살 소년 시절로 돌아가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다. 술 취한 무리가 말라빠진 암말의 짐수레에 올라타 웃고 조롱하며 끝내 쳐 죽이는 장면이다. 짐마차 주인은 수레를 끌기 위해 안간힘 쓰는 여윈 말을 채찍으로, 발길로, 수레채 몽둥이로 죽을 때까지 내려치는데, 폭력의 강도가 강해질수록 분노 또한 걷잡을 수 없이 솟구쳐 올라, 말의 숨통을 끊어놓은 후에도 그 관성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다. 주변 군중도 흥분에 가담한다. 그런 잔인한 현장에서 보통은 눈을 가리거나 자리를 뜨는 법이건만, 소년은 아버지의 만류도 뿌리친 채 죽어가는 말에게로 달려가 부둥켜안고 울면서 피투성이 얼굴에 입 맞춘다. ‘아빠! 사람들은 왜… 이 불쌍한 말을… 죽인 건가요!’

‘내 거다!’ 짐마차 주인은 몽둥이를 휘두르며 후렴구처럼 반복한다. 내 것이니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는 거다. 이 무도한 논리의 부당함에 관해 톨스토이가 일침을 놓은 바 있다. 퇴물이 된 경주마 관점으로 인간 사회를 묘사한 단편 ‘홀스토메르’에서다. 사색하는 얼룩말 홀스토메르에게 인간 사회란 온통 낯선 것 투성이지만, 그중에서도 ‘내 것’이라는 표현이 가장 낯설다. 도무지 자기 것이 될 수 없는 것들을 인간은 ‘내 것’이라 부르고, 그 말을 많이 할 수 있어야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홀스토메르가 볼 때 ‘살아 있는 말에 대해 나의 말이라 하는 것은 나의 흙, 나의 공기, 나의 물만큼이나 이상한’ 것이다.

살아 있는 사람을 두고도 인간은 ‘내 것’이라 주장했던 적이 있다. 어쩌면 여전히 그러는 것도 같다. 투르게네프 단편 ‘무무’는 인간의 무엄으로부터 자신의 존엄을 지켜야 했던 또 다른 인간 이야기다. 모든 것은 당연히 자기 것이라고 여기는 변덕쟁이 여자 지주, 그녀의 소유인 말 못 하는 농노, 그리고 강아지가 등장한다. 무무는 농노가 강에서 건져 살려낸 새끼강아지 이름이다. 말을 못 하기에, 무무라고 부를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자신을 보고 짖었다는 이유만으로 지주는 무무를 농노에게서 빼앗아 없애버리라 명한다. 일찍이 사랑하는 처녀도 그렇게 빼앗겼던 적이 있는 터다. 가슴 아픈 디테일은 다 건너뛰기로 하고, 결국 농노는 자신의 유일한 기쁨인 무무를 강에 빠뜨려 익사시킨다. 털 잘 빗겨놓고, 고깃국 한 번 잘 먹인 후.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무무의 사랑과 신뢰를 배반하지 않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었다. 더는 누구의 것이지 않겠다는, 말 못 하는 농노의 선언이기도 했다.

너무 슬픈 이야기여서, 러시아어 공부하느라 읽었던 그 옛날 이후 다시 펼쳐 들지 못했다. ‘무무’가 쓰인 지 10년째 되던 해인 1861년 농노제가 폐지되었다는 사실만큼은 위안을 준다. 하지만 아직도 동물 이야기는 나를 슬프게 한다. 슬픈 동물, 슬픈 약자가 주변에 너무나 많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2/11/22/VXRUYN2ZAFBJRA2HHGIRKLDVZ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