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유광종의 차이나 별곡

[유광종의 차이나 別曲] [74] 노비의 얼굴과 무릎

유광종 중국인문경영연구소 소장
입력 2020.01.31. 03:13

나를 낮춰 남을 높이는 과거 호칭이 제법 많다. 이른바 인비달존(因卑達尊)의 격식이다. 예치(禮治)를 근간으로 삼았던 이전 동양 사회가 피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정치 체제에서는 그 정도가 심했다. 황제를 폐하(陛下), 제후를 전하(殿下)라고 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계단[] 밑[]의 내가 그 위의 황제를 치켜세우며 ‘폐하’라고 불렀다. ‘전하’는 전각(殿閣) 아래의 내가 그 위의 제후를 받드는 호칭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유행했던 각하(閣下)도 마찬가지다. 관공서를 지칭하는 각()의 아래 사람이 윗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자리 밑의 제자는 스승을 좌하(座下), 좌전(座前)이라고 했다. 귀하(貴下)는 남을 높이는 흔한 존칭이다. 가장 먼저 등장했던 관련 호칭은 족하(足下)다. 남의 발아래 자신을 두면서 상대를 높이는 말이다. 예전 편지글에 자주 등장했다. 절하(節下)와 휘하(麾下)는 자신을 통수하는 군 지휘관을 부르는 말이다.

예치의 틀인 서열과 계급에서의 존비(尊卑) 개념이 매우 두드러진다. 형식적 질서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지만 정도가 지나치면 다 문제가 생긴다. 저를 낮추다가 스스로 땅바닥과 '혼연일체(渾然一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귀결은 노안비슬(奴顔婢膝)이다. 노비의 얼굴과 무릎이다. 윗사람 앞에서 종놈처럼 헤프게 웃거나 바닥을 기며 아첨하는 행위다. 중국의 역대 조정(朝廷)에서 늘 벌어졌던 풍경이다. 현대에는 권력이 크게 쏠렸던 마오쩌둥(毛澤東) 때 심했다.

‘최고 권력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定于一尊]’는 말을 내세우는 요즘도 비슷해 보인다. 우선 대형 재난으로 번지는 우한(武漢) 폐렴 사태가 심상찮다. ‘안정 유지[維穩]’를 국정 지상의 목표로 강조하는 공산당 중앙권력의 눈치만 살피며 은닉과 얼버무림으로 일관했던 중국 관료의 어두운 근성이 사태를 키운 것 아닐까.

원글: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1/30/202001300424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