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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한은형의 느낌의 세계] 낭만 없는 시대의 눈사람

한은형 소설가
입력 2024.01.18. 03:00

일러스트=이철원


‘비가 시원하게 내려서 좋다’ ‘눈이 펑펑 오니 속이 다 시원하다’. 이제는 할 수 없게 되어버린 말들이다. ‘여자치고는 유능하다’라든가 ‘밥을 잘 먹는 게 남자답다’는 말보다도 그렇다. 기후변화로 지구 곳곳에서 사람이 죽고 있는 이 시대에 낭만적인 감탄이 들어설 자리는 없는 것이다. 성인지 감수성(gender sensitivity)만큼이나 기후 인지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요즘이다. 기후 위기 감수성? 기후 감수성? 공식적으로 뭐라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폭설이 왔던 날 나는 비감해졌다. 예전처럼 눈이 온다고 마냥 좋아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몇 년간 접한 기후에 관한 뉴스가 독소처럼 쌓이면서 그렇게 되었다. 폭우로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들은 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고, 며칠 전에는 핀란드에서 영하 43도까지 내려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스웨덴에서는 4000가구의 전기 공급이 끊겼고, 도로가 어는 바람에 폐쇄되어 운전자들은 차 안에서 밤을 보냈다. 덴마크에서는 강풍과 눈으로 도로가 역시 폐쇄되면서 운전자들은 차 안에 갇혀 있었다.

내가 아는 눈에 대한 시들을 떠올려 보았다. 눈이 내릴 때의 몽글몽글한 설렘, 하얗게 뒤덮인 세상의 아름다움, 눈 오는 날의 신비, 눈 내린 거리의 고요한 정경, 폭설로 인한 고립에 대한 시를 말이다. 이런 시를 읽지 않았다면 나는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겨울을 좋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는 카스파르 프리드리히나 브뤼헐이 그린 낭만적이고 절대적인 겨울 그림보다도 겨울에 관한 시들로부터 겨울을 배웠다.

이제 이런 겨울 시를 쓸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시대가 변했는데 여전히 고전적 감수성을 유지하고 있는 시인이 쓴 시는 마음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또 이미 내 마음속에 박힌 이런 겨울 시를 대놓고 향유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백석)나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한계령쯤을 넘다가/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문정희) 같은 시는 쓰일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랄까.

브레히트가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고 말한 것은 나치 독일 때문이었지만 이제는 기후변화로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홀로세 시대가 끝나고 인류세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지질학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 홀로세(Holocene)는 그리스어로 ‘완전히 새로운 세대’를 뜻하며 완신세(完新世)라고도 한다. “너무 덥지도 않고 너무 춥지도 않은 흔치 않은” 황금 시기가 홀로세이고, 인류 문명의 역사는 정확히 홀로세의 역사라고 말하는 책을 읽었다. ‘브레이킹 바운더리스’(요한 룩스트룀‧오언 가프니 저, 전병욱 역, 사이언스북스, 2022)다.

홀로세는 1만2000년 전 시작되어 1950년에 막을 내렸다고 주장하는 이 책은 현재의 시대를 인류세라고 칭한다. 지구는 인류로부터 계속되는 주먹질을 받았으나 아직 인간에게 카운터 펀치를 날린 적은 없다고 위의 책은 말한다. 참을 수 있는 지점을 넘어서면 완전히 다른 얼굴의 지구를 보게 될 것이라며, 홀로세 때의 지구와 인류세 때의 지구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고 말이다. 최근의 여름과 겨울에서 겪은 바가 있으므로 ‘완전히 다른 얼굴의 지구’라는 말이 허풍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폭설이 왔던 날, 나는 이미 만들어진 눈사람과 눈사람을 만들고 있는 사람을 봤다. 눈사람에게 컹컹 짖으면서 달려가는 강아지와 눈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아이도 봤다. 여전히 눈이 많이 내려서 우산을 쓸 수밖에 없었는데 자신은 눈을 맞으며 눈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준 것이다. 이 장면은 나의 마음을 복잡하게 했다. 네 살 정도 되는 저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도 사람들은 눈사람을 만들고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상이 전복될 정도로 눈이 오는데 눈사람을 만들 수는 없을 테니까.

한 바퀴 돌고 다시 거기로 간 것은 눈사람 친구들의 안부가 궁금해서였다. 눈사람이 늘어났을지 줄어들었을지, 어딘가가 덧붙여졌을지 말이다. 아이가 우산을 씌워주었던 눈사람은 이제 거기 없었다. 내가 본 것은 눈사람의 잔해였다.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부수어 뭉쳐진 눈이 된 눈사람이었다. 내가 그날 그토록 눈사람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은 눈사람이 영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영원하지 않다고 생각하니 눈사람의 미소가 그 어느 때보다 신비로웠다.

카스파르 프리드리히
브뤼헐
백석
문정희
브레히트
브레이킹 바운더리스
요한 룩스트룀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4/01/18/BSNFI4ATDRAF7E5W2MUOOZSNI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