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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한은형의 느낌의 세계] “손을 잡는다, 옛날엔 데이트 지금은 부축”

한은형 소설가
입력 2024.02.22. 03:00

일러스트=이철원


오랜만에 텔레비전을 틀었다가 어느 배우가 노래하는 걸 듣게 되었다. 말하듯이 자연스럽게 부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노래에 감정을 싣는 솜씨가 상당했다. 품위 있는 가사로 된 노래를 선곡한 식견도 식견이지만, 단어 하나하나를 곱씹게 하는 또렷하면서도 편안한 발성이었다. 그래서 특별히 좋아하는 배우는 아니지만 눈을 떼지 못했다. 노래는 저런 것이라고, 저렇게 불러야 하는 것이라고 감탄했다. 나처럼 노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사람이 들어도 하던 일을 멈추고 빨려들게 하는 흡인력이 있었다.

그는 원곡자 다음으로 원곡자의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었다. 그 노래를 부르는 원곡자를 볼 때면 생각했었다. ‘어쩌면 저렇게 숨 쉬듯 편하게 부르지?’라고. 대충 부르는 것 같지만 절대 부르기 쉬운 노래가 아닌 원곡자의 노래를 부르겠다고 나섰다가 곤혹스러워했던 이들의 얼굴도 떠올랐다. 여든이 넘은 배우는 그들과 달랐다. 고난도의 노래를 선곡한 사람다운 자신감을 뿜어냈고, 또렷한 목소리였다. 나이가 들면 목소리도 늙는다던데 그러지 않는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쏘아보는 듯 강한 눈빛도, 당당한 체격도 여든이 넘은 사람 같지 않았다.

그때 배우의 자세가 눈에 들어왔다. 그랜드피아노 앞에 서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기대어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내내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서 있는게 힘들지만 견디고 있었다. 내 눈에 그는 그랜드피아노라는 거대하고 심미적인 지팡이에 기대어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보였다. 만감이 교차한 순간이었다. 얼마 전에 읽은 이 시가 떠올랐다. “손을 잡는다/옛날에는 데이트/지금은 부축.” 오사카에 사는 일흔여섯 살 된 여성의 글이다. 꼭 경험해야 글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이건 겪고 쓴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이라는 책에서 읽었다. 이 책의 부제는 ‘노인들의 세상을 유쾌하게 담다–실버 센류 모음집’이다.

실버 센류’란 일본에서 전국유료실버타운협회의 주최로 2001년부터 매해 여는 센류 공모전의 이름이다. 실버(silver)는 ‘노년 세대’를 뜻하는 일본식 영어로 머리가 백발이 되는 것에서 따온 단어다. 일본 철도의 노약자석인 ‘실버 시트’가 어원이라고 한다. 실버 시트, 실버 에이지, 실버 인재 센터 등으로 쓴다. 뒤표지에는 이런 말이 있다. “시리즈 누계 90만부 판매! 페이지마다 웃음이 터져 나오는 실버 센류 걸작선.” 편의상 시라고 했지만, 센류라는 장르다. 센류(川柳)는 5·7·5조의 음율을 가진 일본의 정형시로, 음율은 하이쿠와 같지만 하이쿠가 진지한 쪽이라면 센류는 더 경쾌함을 요구한다.


이 책이 일본과 한국에서 나오고, 베스트셀러가 된 걸 보면서 이제 ‘노인’이라는 소재가 주변에서 중심으로 들어왔다고 느꼈다. 현실 세계에서는 많은 노인을 매일 보지만 노인이 나오는 소설, 노인이 나오는 영화, 노인이 나오는 노래는 극히 드물었다. 우리는 노인이라는 누구나 거치는 인생의 필연적인 단계를 홀대하거나 모른 척해 왔다. 노인 인구에 비해 엄청난 불균형이다. 노인 인구 비율은 계속 증가해 2050년이 되면 40.1%, 2070년에는 46.4%가 된다고 한다. 물론 이 통계에 맹점은 있다. 노인의 기점을 65세 이상으로 잡고 있는데, 65세 된 분들이 자신을 노인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에 경쾌한 글만 있는 건 아니다. “일어나긴 했는데/잘 때까지 딱히/할 일이 없다”(사이타마현의 일흔세 살 남성)나 “연명 치료/필요 없다 써놓고/매일 병원 다닌다”(미야기현의 일흔 살 남성)에는 숙연해지고, “물 온도 괜찮냐고/자꾸 묻지 마라/나는 무사하다”(기후현의 남성)나 “눈에는 모기를/귀에는 매미를/기르고 있다”(오사카의 예순일곱 살 남성)에는 여운에 잠긴다. ‘노인의 사랑은 노망’이라는 걸 전제로 쓴 글과 “사랑인 줄/알았는데/부정맥”이라는 표제작을 보고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늙었다고 해서 왜 사랑을 모르겠는가.

80대 배우가 불렀던 노래는 송창식의 ‘우리는’이었다. 가사를 일부 여기에 적는다. “우리는 바람 부는 벌판에서도 외롭지 않은/우리는 마주잡은 손끝 하나로 너무 충분한/우리는 우리는 기나긴 겨울밤에도 춥지 않은/우리는 타오르는 가슴 하나로 너무 충분한/우리는 우리는 연인.” 늙었다고 해서 이 노래에 아무런 느낌이 없겠는가.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며 노인의 사랑이 너무 오랫동안 억압되어 왔다고 생각했다.

사랑인 줄 알았는데 부정맥
송창식
우리는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column/2024/02/22/TSGV5ZNHAZCXXOVODT2ARASXG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