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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꿈·사랑·죽음도 사고파는… 모든 걸 거래하는 세상은 행복한가

특집 : 지금 문학은
이영관 기자
입력 2024.02.24. 03:00

일러스트=이철원

문학은 바다에 떠있는 부표 같습니다. 현실이란 거센 파도가 밀려올 때, 현재를 가늠하고 미래를 꿈꾸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Books는 그 부표로서 매달 ‘지금 문학은’ 특집을 선보입니다. 최근 소설을 엄선하고 소설들이 공유하는 키워드로 지금이란 현실을 다시 읽습니다. 이달의 키워드는 ‘거래’입니다. 무엇이든 사고팔 수 있는 시대의 희비극을 조명합니다. 문학 현장을 종횡무진하는 이들이 다채로운 부표를 더합니다. 문학평론가 강동호 인하대 교수가 이달의 시집을 골랐습니다. 동아시아 작가로는 처음으로 영국 대거상 번역추리소설상을 받은 윤고은 소설가가 장르 소설을 추천합니다. 독자 각자의 지금을 떠올려보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든 사고팔 수 있는 세상은 인간에게 선물일까, 저주일까. 확답하긴 어렵지만 이미 그런 시대가 왔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여기에 없는 물건? 천국에도 없어!’ 김홍 소설 속 장사꾼의 말이 낯설지 않다. 김홍, 박지영, 강영숙의 소설은 물질만능주의에 잠식당한 지금을 비춘다. 김홍 소설은 이해할 수 없는 웃음을, 박지영과 강영숙의 소설은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어느 순간 웃음이 멈춘다면,

죽음·생명에 이미 값을 매기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소설에서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름과 본질에 속지 마라”

김홍 장편 ‘프라이스 킹!!!’은 ‘거래’의 가능성을 극한으로 확장시킨 세상의 모순을 드러내 보인다. 29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이다. ‘정치는 따분하고 장사는 영원하다’고 여겨지게 된 세상에서 전설적 장사꾼 프라이스 킹 배치 크라우더는 그 누구보다 존경받는다. 모든 물건을 사고팔 수 있음을 증명해 왔기 때문. 그런데 그의 마트는 꽤 이상하다. 생필품 사러 온 손님은 현란한 입담으로 돌려보내고, ‘대상 없는 복수’ ‘견딜 만한 불행’처럼 모순된 것을 사려는 거래에는 응한다.

프라이스 킹!!!


김홍 소설 | 문학동네 | 264쪽 | 1만5000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유쾌한 문장이 독자를 마구 흔드는데, 그 중심엔 이런 말이 있다. “이름에 속지 마라. 본질에도 현혹되지 마라.” 배치 크라우더가 마트 직원인 화자에게 건넨 말이다. 작가는 사기에 가까운 거래가 이뤄지는 이야기를 통해 무엇이든 거래 가능한 세상에서 오히려 원하는 것은 얻을 수 없게 됨을 꼬집는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만이 자기 자신으로 살 수 있다”고 말하면서.

◇”싸구려? 인생에 가격표 붙여선 안 돼”

시선을 가까이로 돌려보자. 박지영 소설집 ‘테레사의 오리무중’에 실린 단편 ‘장례 세일’은 아들이 아버지 장례식을 거짓 홍보하는 이야기. 아버지는 남긴 것 없는 세일즈맨, 아들도 직장이 변변찮다. 썰렁한 장례식장이 아버지 삶을 물려받는 거라 느낀 아들은, 아버지와 잠시 거래했던 이들에게 ‘아버지가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는 식의 거짓 편지를 보낸다. 장례식 흥행은 성공. 아버지 죽음의 가격을 고민하는 아들, 장례식장에서 아버지를 아는 것처럼 추억하는 이들의 모습이 현실에 있을 법해 쓴웃음이 지어진다.

테레사의 오리무중


박지영 소설 | 자음과모음 | 244쪽 | 1만4000원

죽음의 가격을 두고 저울질하던 소설은 의외의 지점에서 멈춰 선다. 거짓 편지를 받지 않았음에도 아들에 대한 미안함만으로 한 여성이 찾아온 것. 그의 온전한 선의를 느낀 아들은 “누구도 타인과 자신의 인생에 함부로 싸구려 인생이라는 가격표를 붙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질적 가치가 아무리 중시되더라도, 단 한 명의 선의가 있다면 삶은 나아진다는 작가의 낙관이 엿보인다.

분지의 두 여자


강영숙 소설 | 은행나무 | 232쪽 | 1만6800원

강영숙 장편 ‘분지의 두 여자’ 역시 이 단 한 명의 ‘선의’가 지닌 힘을 강조한다. 유전자에 따라 생명의 가치가 결정되고, 대리모 일이 ‘10개월 만에 큰돈을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 정도로 인식되는 세상이다. 소설은 딸을 잃은 고통을 잊기 위해, 생계를 위해 대리모가 되려는 두 여자를 중심으로 생명과 관련된 윤리적 이슈를 다룬다. 가령 유전적으로 결함이 있는 아기는 버려도 되는가의 문제. 소설에선 이미 그런 재앙이 현실이 됐다. 그러나 “그렇게 버려질 만큼 출생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 완벽한 존재는 없다”고 되묻는 청소 용역 민준이 있다. 버려진 아기를 줍고, 방황하면서도 생명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가는 그를 통해 계산이 가득한 세상에 희망이 남아있음을 보여준다.

◇“물질적 가치 따라가되 치우치지 말 것”

세 소설은 모두 물질적 가치가 압도하는 시대에 대한 우려를 내비치지만, 명확한 선악 판단을 내리진 않는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비용은 돈의 문제를 넘어 인생을 확인받는 일이며, 대리모란 일 역시 누군가에겐 고통을 치유하는 과정이다. 하나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면, 한쪽에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다. 물질적 가치가 압도하는 세상을 바라보며, 한 번쯤은 반대편도 돌아보라는 것. 김홍 소설은 우여곡절 끝에 이런 말에 다다른다. “턱밑까지 쫓아오기 전까지 어찌어찌 도망 다닐 수밖에요.” 현실의 흐름에 ‘어찌저찌’ 따라가면서도, 옆을 보는 여유. 쉽지 않지만 이런 유머의 힘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말하는 듯하다.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
원글: https://www.chosun.com/culture-life/book/2024/02/24/I3TSL4C7BJDPDBJ7CBDM4VQPZ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