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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자작나무 숲] 내 이름이 그대에게 무엇이리

김진영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입력 2024.02.27. 03:00

시대를 상징한 수많은 이름들, 그러나 이름은 혹여 덧없는 껍데기는 아닌가
장미는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향기롭거늘… 셰익스피어가 던진 질문에
푸시킨이 200년 뒤 詩로 화답한 듯… “그리움으로 나를 기억하고 불러주오”

일러스트=이철원


물론 이름도 유행을 탄다. 매년 새로운 학생들 출석부를 받아 보며 확인하는 사실이다. 사법부가 내놓은 시대별 통계도 있고, 사설 기관이 분석한 자료도 나와 있는데, 2022년에 가장 인기 높던 신생아 이름은 이서·서아·지아(여), 이준·시우·서준(남)이었다 한다. 1940년대부터 10년 단위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40년대 대표 이름은 영수·영자, 50년대는 영수·영숙, 60년대 영수·미숙, 70년대 정훈·은주, 80년대 지훈·지혜, 90년대 지훈·유진이었다.

2000년대 초반쯤이었을까, 순우리말 이름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가람, 보람, 한샘, 초롱, 누리, 이슬, 송이 등이 주위에 많았다. 요즘에는 다시 전통적 한자어, 그러나 발음이 순하고 중성적인 이름이 대세다. 기억에 새겨진 이름으로 핑크와 사랑이 있다. 핑크색을 좋아한 어머니가 그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여학생은 어쩐지 분위기도 핑크빛다웠다. 사랑이란 학생은 부모가 선교사다. 수업 시간에 “사랑…” 하고 부를 때면 내 목소리는 저절로 부드러워지곤 했다.

1940년대 이전을 대표하는 여성 이름은 순이다. “순이들은 끌려갔다”는 충격적 문장으로 백신애의 단편 ‘꺼래이’는 시작한다. “내 사랑하는 오직 하나뿐인 누이동생 순이”(임화) “가난에서 나고 가난에서 자라” 술집 여자가 된 옥순이(이찬), 하르빈 매음굴로 전락해 자살하는 계순이(이효석), 그리하여 “종로 네거리의 열아홉 살쯤 스무살 쯤 되는 애들”로 부활하는 순아(서정주)는 모두 근대기 순이의 계보에 속한다. 무고한 수난과 희생의 상징 순이, 수많은 오빠의 누이이자 연인이던 순이는 도스토옙스키 소설 ‘죄와 벌’의 여주인공 소냐를 닮았다. 가족을 위해 매춘부가 된 열여덟 살 소냐는 가난한 대학생 라스콜니코프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순정의 인물이다. 발음에서마저 소냐와 순이는 서로를 메아리친다.

순이가 향토적 상징성을 띠었다면, 같은 시기 이국적 상징성을 뽐낸 이름도 있다. 김마리아·박마리아·차미리사·황에스더·이도리티 같은 서양 이름은 선교사에게 내려받거나 신여성 스스로 선택한 문명의 표지였다. 동시대 남성 지식인의 낭만적 상상력을 자극한 것은 영미권이 아닌 러시아 이름이다. 카추샤, 나타샤, 소냐, 옐레나, 안나, 올렌카…. 북국을 향한 동경과 러시아 문학 속 여주인공의 친숙감이 그 이름을 소리 내 부르도록 이끌었다.

시대 흐름은 작명의 흐름을 좌우한다. 러시아 이름의 변천사도 흥미로운데, 소비에트 혁명 열기가 절정에 이른 시기에는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을 압축한 빌렌(Vilen), 마르크스·엥겔스·레닌·스탈린의 머리글자 합성어인 멜스(Mels) 같은 믿지 못할 이름이 실재했다. 소련 붕괴 후에는 아나스타샤, 폴리나류의 복고풍 이름이 재부상했다.

그러나 시대의 징후가 되었건 말건 “이름이 뭐란 말인가?(What’s in a name?)” 장미는 장미 아닌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여전히 향기롭거늘. 셰익스피어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가문의 적을 사랑하게 된 줄리엣이 펼치는 논법이다. 로미오의 완벽함은 아무 호칭 없이도 그대로일 터, 저주스러운 이름일랑 벗어던지라는 것이다. 그러자 로미오가 답한다. “나를 사랑이라 불러주오. 새롭게 세례받은 나/ 그 순간부터 다시는 로미오가 아닐 테니.”

러시아 시인 푸시킨 도 비슷한 질문을 던졌다. “내 이름이 그대에게 무엇이리?/ 머나먼 해안에 부서진 슬픈 파도 소리처럼,/ 한밤중 깊은 숲의 술렁임처럼,/ 사라져버릴 이름인데.” 한때 사랑한 여인의 앨범에 적어준 시다. 이름을 남겨달라며 내민 화첩에 시인은 서명 대신 그렇게 써 내려갔다. 사랑이 사라지듯, 만물이 사라지듯, 이름도 사라질 것이다. 덧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내 이름이 그대에게 무엇이리?” 그런데 시는 마지막 연에서 반전을 일으킨다. “하지만 슬픔의 날, 적막 속에서,/ 그리움에 잠겨 불러주오/ 그리고 말해주오. 누군가 나를 기억한다고,/ 이 세상 누군가의 마음에 내가 살아 있다고….

푸시킨이 옛사랑에게 써준 이 시가 실은 셰익스피어의 2백여 년 앞선 질문에 대한 화답으로 들린다. 사랑에 빠진 연인에게는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고, 물리적 실재 외에는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하지만 장미가 죽으면 냄새 맡을 향기도 없고, 로미오가 죽으면 어루만질 육체도 없다. 그러니 그것으로 그만이란 말인가? 푸시킨의 질문은 존재의 무상함에 대한 반론으로 이어진다. 그는 지나가버린 것의 아름다움을 생각할 줄 안다. 과거를 끌어안아 사랑하는 기억의 힘, 오직 그 힘이 사라졌던 실체를 불러내고 되살려낼 것이다. 껍데기에 지나지 않던 이름도 그때는 불멸의 마중물이다.

백신애
임화
이찬
이효석
서정주
도스토옙스키
셰익스피어
푸시킨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4/02/27/OEQ2GW4Z25ARHM2QNJMF5JBJV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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