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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반도체로 2만불, 車로 3만불 시대… '4만불 엔진' 안 보인다

김정훈 기자 최아리 기자
입력 2025.04.29. 00:55 업데이트 2025.04.29. 14:07

한국 경제가 2029년에야 1인당 GDP(국내총생산) 4만달러 벽을 넘을 것이라는 국제통화기금(IMF)의 전망이 나왔다. 6개월 전까지만 해도 IMF는 2027년을 4만달러 돌파 시점으로 봤는데 이를 2년 뒤로 늦춘 것이다. 고환율이 표면적인 이유지만, 경제 성장 동력 상실이 주된 요인이라는 지적이 많다.

28일 IMF의 ‘세계 경제 전망’에 따르면 한국은 2029년에 1인당 GDP가 4만341달러를 기록하며 4만달러 선을 넘을 것으로 전망됐다. 지난 2014년 3만달러를 넘었고, 4만달러까지 가는 데 15년이 걸릴 것으로 본 것이다. 미국·영국·독일·프랑스·일본 등 주요 5국이 1인당 GDP 3만달러에서 4만달러까지 진입하는 데 평균 6년이 걸렸던 것을 감안하면, 성장 속도가 뚜렷하게 뒤진다.


IMF는 지난해 10월 보고서에서는 2027년 4만1031달러를 기록할 것으로 봤는데, 6개월 만에 한국 경제를 보는 눈높이를 확 낮췄다. 지난 6개월 동안 국내 정치는 불안정했고, 전 세계적인 보호무역주의가 수출 중심 한국 경제 체계를 위협했다. 한국 경제의 기초 체력이 떨어진 것을 반영해 지난 6개월 동안 달러화에 대한 원화 환율은 125원(9.4%) 올라 달러화로 표시되는 GDP 자체를 갉아먹었다.

신성장 동력이 뚜렷하지 않은 한국 경제의 구조적인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한국이 1인당 GDP 2만달러로 진입할 때는 반도체, 3만달러로 진입할 때는 자동차·화학·정유라는 버팀목이 든든했다. 이윤수 서강대 교수는 “한국 경제에서 반도체가 주력 산업으로 뜰 때는 우리 사회 전반에 ‘한번 해보자’는 역동성이 있었지만, 지금은 인공지능(AI)이나 로봇이라는 신산업이 떠도 ‘미국이나 잘할 수 있는 산업’이라는 생각이 만연해 있다”며 “신성장 산업이 뚜렷해야 연관 산업도 함께 발전하고 전체 경제도 성장한다”고 했다.

◇반도체로 2만불, 車로 3만불 시대… ‘4만불 엔진’은 안 보여

1만729달러(1994년)→2만162달러(2005년)→3만667달러(2014년).

한국 경제는 1인당 GDP가 1만달러 간격의 허들을 넘을 때마다 확실한 동력을 갖고 있었다. 1만달러를 돌파한 1994년엔 저금리·저유가·저달러 3저(低) 호황이 뒷받침된 수출 입국 정신과 1988년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바탕으로 한 자신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2만달러를 달성한 2005년은 반도체 D램 세계시장 점유율 28%로 1위, 낸드플래시 메모리 50%로 1위 등 반도체 강국의 입지를 탄탄히 다진 해였다. 3만달러를 넘은 2014년쯤에는 자동차·화학·정유(차화정)가 반도체와 함께 수출을 쌍끌이했다.

일러스트=이철원


◇한국, 혁신적 성장 동력 부재

산술적으로만 계산하면 1만달러에서 2만달러까지 2배로 성장하는 것보다, 3만달러에서 4만달러까지 1.33배로 성장하는 것이 더 쉬울 수 있다. 한국 경제는 1인당 GDP 2만달러에서 3만달러까지 연평균 4% 가까운 성장을 거듭해 9년 만에 달성했다. 같은 성장 속도가 유지됐다면 3만달러에서 4만달러까지 가는 데 6~7년밖에 안 걸린다는 계산이 나온다. 하지만 3만달러 벽을 넘은 뒤 한국 경제의 성장률은 2% 정도로 반 토막 났고, 4만달러 수준에 도달하는 데 15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는 처지에 빠졌다.

혁신 부재 때문이라는 게 공통되는 지적이다. 지난 20년간 변화가 없는 한국의 수출 구조가 한국 경제의 어려움을 가속한다는 것이다. 지난 2005년과 작년, 한국의 10대 수출 품목을 비교하면 컴퓨터가 제외되고, 가전제품이 새로 진입한 것 외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 현재 1위 산업인 반도체는 2005년에도 1위였고, 2005년 2위였던 자동차는 여전히 2위다. 안동현 서울대 교수는 “한국의 주력 5대 산업이 반도체, 자동차, 석유화학, 조선, 철강인데, 여기서 반도체 하나 빼고는 모두 중화학공업 육성책을 폈던 1960~70년대 산업”이라며 “반도체 하나만 ‘이건희’라는 특수한 인물이 나타나 1980년대 후반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한정된 재원을 앞으로는 신(新)기술 기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상봉 한성대 교수는 “요즘 학생들에게 물어봐도 제조 업체 가라고 하면 안 가겠다고 하지만, 직원 두세 명이고 연봉이 작더라도 AI 회사라고 하면 가겠다고 한다. 미래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른 나라들은 혁신·개혁으로 뚫어

미국 1인당 GDP는 1997년 3만달러를 넘었고, 7년 뒤인 2004년 4만달러를 돌파했다. 2023년에는 주요국 중 처음으로 8만달러 시대를 열었다. 미국의 힘은 끊임없는 혁신이다. 혁신 기업에 진입 장벽이 높지 않은 미국에서는 IT, 바이오, 인터넷 콘텐츠 분야 신생 기업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도전을 해 왔다. 영국은 2002년 3만달러를 넘은 지 2년 만에 4만달러를 넘었다. 사라지는 제조업 일자리 대신 금융·서비스 등 지식 집약적 고부가가치 산업의 일자리를 새로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런던은 여전히 유럽 금융 중심지이며, 법률·컨설팅 등 고부가 서비스 산업의 선두 주자다.

1995년 3만달러를 넘어선 독일은 2년 뒤 2만달러대로 다시 미끄러졌다. 통일 비용 증가와 연금 부담 때문이다. 독일은 구조 개혁을 선택했다. 2002년 당시 좌파 게르하르트 슈뢰더 정권은 기간제 노동 계약 도입, 실업급여 수령 기간 단축 방안을 담은 ‘어젠다 2010’을 마련했다. 법인세율을 낮추고 구조 조정에 공을 들인 독일은 2007년 4만달러 장벽을 넘었다.

구미 선진국처럼 혁신하거나 개혁하지 않으면 일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란 비관적인 전망도 많다. 일본은 1992년 3만달러, 1995년 4만달러의 벽을 허물었다. 주요국 중 최초였지만 거기까지였다. 일본 기업들은 시대 변화에 맞춰 경쟁력을 높이지 못했고, 일본 정부는 성장 정체를 방조해 ‘잃어버린 30년’을 자초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IMF는 일본의 1인당 GDP가 2029년에 4만달러로 재진입하겠지만 여전히 한국을 따라잡지 못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김정식 연세대 명예교수는 “한국도 산업을 혁신하지 못하고, 강성 노동조합과 이익집단 등 기득권층의 저항을 깨뜨려 개혁하지 못하면 서서히 말라 죽는 일본의 길을 가기 쉽다”고 했다.

원글: https://www.chosun.com/economy/economy_general/2025/04/29/FCDYUDVVLZFO3GHS4SZZ2HLIMM/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