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혁 극작가·연출가
입력 2025.05.08. 00:29 업데이트 2025.05.08. 09:36
20대에 처음 의기투합, 40대에 다시 올린 '늙은 소년들의 천국'
분장실·술집·결혼식·장례식… 삶의 장면마다 함께였던 우리
우리는 연극을 넘어 서로의 인생에 출연하며 20년을 살아왔다
‘마당극단 걸판’은 한때 나의 모든 것이었다. 2004년 창단을 해서 1년에 200회가 넘는 공연들을 펼치며 전국을 돌아다녔다. 우리는 마당극단이었기에 다양한 공간에서 공연을 했다. 학교의 교실, 공장의 작업실, 추수가 끝난 논밭, 촛불문화제가 펼쳐지는 광장까지. 20대에 연극을 시작했는데,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40대가 되어 있었고, 우리들은 언제 어떻게 헤어졌는지도 모르게 서로가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다.
올해는 ‘걸판’의 20주년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는 그 시간의 절반쯤을 떨어져 있었다. 2004년, 이제 막 20대가 된 우리들은 아주 당연히 가진 것이 없었다. 누군가는 학자금이 없어 학교를 그만둔 휴학생이었고, 누군가는 군대에서 막 제대해서 학자금을 벌고 있던 복학생이었으며, 누군가는 집을 잃어버린 부모님을 돕기 위해 밤새 아르바이트를 하던 고학생이었다. 우리가 가진 것은 ‘연극’이라는 두 글자뿐이었다. 우리의 몸은 현실에 매여 있었지만 우리는 연극에서 언제나 미래를 이야기했다. 일한 만큼 정당한 대우를 받는 세상에 대해서, 약자와 소수자가 평등함을 누리는 사회에 대해서, 어떤 꿈이라도 자유롭게 꿀 수 있는 세계에 대해서. 정신없이 몰려오는 현실과 정신없이 상상해내는 미래를 오가다 보니 어느새 10년 세월이 흘러 있었다. 10년의 세월 동안 서로의 마음속에 쌓인 생각들은 넓고 깊었다. 우리는 저마다 각자의 길로 떠났다.
그렇게 다시 10년의 세월이 지난 올해 봄, 문자가 왔다. “우리, 그 연극 다시 할까?” 우리가 10년 전 마지막으로 펼쳤던 연극 ‘늙은 소년들의 왕국’. 비극의 왕 리어와 희극의 왕 돈키호테가 광장에서 만나 자신들만의 왕국을 만들어내는 연극. 허무맹랑한 상상이지만 세상에 대한 우리의 꿈이 뜨겁고 절실하게 담겨져 있는 연극이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우리는 10년 넘게 떨어져 있었지만 10년 내내 서로를 그리워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다시 모였다. 20년의 세월이 흘러서 그야말로 ‘늙은 소년들’이 되어 ‘걸판’의 이름으로 모였다.
반가운 얼굴들이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우리의 시공간은 곧바로 10년 전으로 날아갔다. 긴 연습이 필요 없었다. 이미 모든 대사와 감정과 행동이 온몸에 배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10년 동안 이 연극을 그리워한 동료들이었다. 어쩌면 이들은 10년간 계속해서 이 연극을 연습해온 셈이었다. 10년 넘게 한 무대에 있었기에 서로가 서로의 역사를 알고 있었다. 설명이 필요 없는 팀워크였다.
연습이 끝나도 아무도 집에 가지 않았다. 술잔을 들고, 이야기를 풀고, 울컥하고, 웃었다. 그때는 그렇게 심각했던 갈등과 상처였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 갈등과 상처가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데까지 10년의 세월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무대가 올라가자, 관객들이 찾아왔다. 10년 전 ‘늙은 소년들의 왕국’을 처음으로 봤던 관객이 다시 객석으로 찾아왔다. 10년 전 ‘늙은 소년들의 왕국’ 무대에 섰던 배우가 이번에는 객석에 앉았다. 10년 전에 이 연극을 보고 배우의 꿈을 꾼 고등학생이 진짜로 배우가 되어 나타났다. 그들과 무대와 객석에서 서로를 마주하는 순간, 우리 모두는 10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났다.
나는 객석에 조용히 앉아서 다시 우리의 연극을 바라보았다. 무대 위에서 왕국을 세우고, 전쟁을 치르고, 동료를 모아나가는 80여 분의 시간 동안, 내 마음속에서는 20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흘러가고 있었다. 막이 내리고 조명이 꺼지는 순간, 나는 문득 깨달았다. 왜 우리가 10년 넘게 서로를 그리워했는지.
우리는 20년간 연극을 만들어낸 것을 넘어서, 서로의 인생에 출연하며 20년을 함께 살아낸 것이었다. 연습실에서, 분장실에서, 술집 테이블에서, 결혼식장에서, 병원 대기실에서, 장례식장 구석에서, 무대보다 더 많은 삶의 장면을 함께 견뎌냈다. 울어야 하는 순간에 함께 울었고, 웃어야 하는 순간에 함께 웃었다. 서로가 서로의 인생에 주인공으로 남았다.
그 모든 주인공들이 하나의 무대에 다시 모여서 서로를 바라보고 서로에게 말을 걸고 서로를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내 연극의 주인공들, 아니 내 인생의 주인공들. 나의 20년을 함께 살아내 준 가족 같은 사람들.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우리의 연극은 단 나흘밖에 남지 않았다.
아마도 나흘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가 함께 만들어내는 무대는 다시 한동안 사라지고, 우리는 다시 각자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30년이 흐르고, 40년이 흐르고, 50년이 흘러도,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역사를 알고 있으니까, 서로가 서로의 인생에 주인공들이니까. 언제든 다시 만나는 그 순간, 서로를 향한 대사와 감정과 행동이 아무 연습 없이도 흘러나올 테니까.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05/08/VJ7PDWMPNRFGZJQK4FQGUIMF7U/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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