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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만물상] 치매 머니

김태훈 논설위원
입력 2025.05.06. 20:49 업데이트 2025.05.07. 14:27

일러스트=이철원


경기도에 사는 한 국가유공자 노인은 통장에 돈이 들어오면 5만원권으로 인출해 집안 러닝머신의 빈 공간에 보관했다. 그렇게 4800여 만원을 모았지만 치매에 걸리는 바람에 돈을 모아왔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 딸이 분리수거 때 러닝머신을 버렸다. 다행히 수거업자가 돈을 발견해 경찰을 통해 찾아줬다. 우리보다 먼저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서도 비슷한 일이 자주 벌어진다. 한 치매 노인이 생활고로 기초생활수급자 신세가 됐는데 알고 보니 1억원 넘는 장롱 속 현금을 갖고 있었다.

치매 노인이 보유한 금융 자산을 ‘치매 머니’라고 한다. 주인도 모르는 돈인 만큼 범죄의 표적이 되기 십상이다. 몇 해 전엔 자기가 돌보던 노인이 치매에 걸리자 은행 비밀번호를 알아낸 뒤 6년에 걸쳐 13억여 원을 인출해 빼돌린 간병인이 덜미가 잡힌 적도 있다.

▶치매 머니 피해를 막기 위한 각종 금융 상품도 등장했다. 미국에선 인공지능이 노인 각자의 씀씀이 패턴을 파악해 뒀다가 이상한 돈 흐름이 나타나면 경고하는 맞춤 금융 서비스를 한다.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은 연구를 통해 치매에 걸리기 5~6년 전부터 금융 거래가 집 주변에서만 이뤄지고 동일한 금융 거래 실수를 반복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치매 조기 진단에 활용한다. 반면 우리는 자녀가 부모 재산을 멋대로 빼가지 못하도록 성년후견 제도를 운영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일본은 전체 금융 자산의 20%를 75세 이상 노인이 보유하고 있다. 치매 머니는 우리 돈으로 1230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큰돈이 장롱이나 은행 계좌에 방치된 것이 경제 활력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 일면서 치매 머니를 끌어내기 위한 다양한 정책이 만들어지고 있다. 손주 교육비로 증여하면 비과세 혜택을 주고 있다. 사망 3년 전에 사전 증여하면 상속세를 면제해주던 것을 7년 전 증여로 당기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2023년 기준 한국의 65세 이상 치매 환자가 보유한 금융 재산이 150조원 넘는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GDP의 6.4%에 이르는 거액이다. 65세 이상 치매 환자가 124만명이고 그 중 76만명이 자산이 있으니 1인당 2억원을 갖고 있는 셈이다. 2050년엔 치매 머니가 488조원에 달해 전체 GDP의 15%를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치매 머니는 결국 땀 흘려 벌어 놓고 써보지도 못한 돈이다. 무작정 모으고 아낄 게 아니라 건강할 때 맛있는 것 더 먹고, 보고 싶은 것 더 자주 보러 돌아다니며 슬기롭게 쓰다 보면 더욱 건강하고 행복하게 장수할 수 있을 것이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manmulsang/2025/05/06/XUCOHV3GF5D4NHL66UPN6D3VYY/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