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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박건형의 닥터 사이언스] 왜 한국에는 대통령의 과학 선생님이 없을까

박건형 기자
입력 2025.05.20. 00:24 업데이트 2025.05.20. 10:00

美 대통령 과학 선생님이자 세계 첫 수소탄 만든 가윈 별세
반세기 넘게 주요 정책 결정 조언하고, 거침없는 반대도
韓 대통령도 과학으로 답해 줄 제대로 된 선생님 찾아야

일러스트=이철원


20세기 물리학 전성기는 두 부류의 과학자가 이끌었다. 아인슈타인하이젠베르크 같은 그룹이 가설을 세우고 수식을 만들면 다른 그룹이 실험으로 이를 입증했다. 이론물리학과 실험물리학이라는 현대물리학의 두 축이 이때 완성됐다. 드물게 두 분야 모두 능한 사람도 있었다. 세계 첫 원자로 ‘시카고·파일 1’을 만든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엔리코 페르미가 대표적이다. 페르미는 탁월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그의 제자 중에 겔만리정다오양전닝 등 노벨상 수상자 6명이 나왔다. 하지만 그가 가장 높이 평가한 제자는 따로 있었다. 1947년 박사 과정에 입학한 19세 청년 리처드 가윈을 두고 페르미는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천재”라고 했다.

1949년 가윈이 졸업하자 페르미는 그를 로스앨러모스 연구소로 보냈다. 연구소에서는 원자탄을 뛰어넘는 무기 개발이 한창이었다. 당시 과학자들은 핵분열 대신 핵융합으로 훨씬 더 큰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현실에 구현하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가윈은 2년 만에 텔러-울람 설계로 불리는 다단계 핵폭탄을 만들어냈다. 1952년 11월 1일 서태평양에서 실험이 이뤄졌다. ‘마이크‘라는 코드명을 가진 82t 무게 폭탄은 히로시마 원자탄보다 700배 큰 위력을 나타냈고, 버섯구름은 160km까지 퍼졌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무기, 수소폭탄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로스앨러모스를 떠난 가윈은 최첨단 민간 연구소였던 IBM으로 향했고, 이 선택은 그를 제2의 에디슨으로 만들었다. 정찰 위성, 자기공명영상(MRI), 레이저 프린터, 위성항법장치(GPS), 터치스크린 핵심 기술이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오늘날 우리는 가윈의 발명 위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 조엘 셔킨은 2017년 ‘진정한 천재 리처드 가윈의 삶과 업적’에서 “당신이 들어본 적 없는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자”라고 썼다.

지난 13일 97세로 세상을 떠난 가윈의 부고에는 단순한 과학자 이상인 가윈이 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그를 ‘대통령의 과학 선생님’으로 기록했다. 가윈은 아이젠하워·케네디·존슨·닉슨·카터·클린턴의 과학 자문위원이었다. 부시 부자와 오바마, 바이든도 가윈을 찾았다. 민주당과 공화당 모두 과학적 지식과 지정학적 식견을 갖춘 가윈의 말에 귀 기울였다. 그 결과 가윈은 마치 영화 ‘포레스트 검프’의 주인공처럼 역사적 장면 곳곳에 등장한다. 닉슨이 초음속 수송기를 개발하려 하자 “상업적 성공 가능성이 낮고, 환경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했다. 의회는 예산을 삭감했고, 영국과 프랑스가 개발한 콩코드는 가윈이 옳았다는 증거가 됐다. 레이저로 옛 소련의 미사일을 요격하겠다는 레이건의 ‘스타워즈’ 계획이 무산된 것도 “현재 기술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효과도 없다”는 가윈의 반대가 결정적이었다. 대통령의 말도 거침없이 반박한 가윈의 영향력은 모든 판단이 과학에 근거해야 한다는 정치인들의 철학 덕분에 가능했다. 가윈의 의견이 항상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그와 대립하던 사람들도 과학이 필요할 때면 가윈을 다시 찾았다. 가윈 생전 그와 긴밀하게 소통하지 않았던 유일한 대통령이 트럼프였다.

과거 한국에도 가윈 같은 과학자가 있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을 세워 한국 과학기술과 산업 발전의 토대를 닦았고 한국연구재단과 대덕연구단지를 만든 고 최형섭 박사다.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든 최 박사의 업적은 박정희와 박태준이라는 정치인들의 확고한 믿음과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가능했다. 과학기술의 비전 설계와 실행을 과학자에게 맡긴 덕분에 지금의 한국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제 한국엔 가윈과 비슷한 과학자도, 과학자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는 정치인도 없다. 대선을 앞두고도 인공지능(AI)에 100조원을 투자한다거나, 전략 기술 연구개발 규모를 10조원대로 확대하겠다는 등 과학을 가장한 숫자만 쏟아진다. 진정으로 저런 공약이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것이라 믿는다면 그건 더 심각한 문제이다. AI·양자 같은 미래 성장 동력 발굴과 기후·에너지 위기 대응은 물론 의사 정원 문제까지 현재 우리가 안고 있는 중요한 과제 대부분은 과학으로 귀결된다. 이런 질문에 답해줄 수 있는 과학 선생님을 찾는 것. 차기 대통령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엔리코 페르미
겔만
리정다오
양전닝
리처드 가윈
천재 리처드 가윈
최형섭 박사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05/20/WLBVAEORLJCRVDD32UY4A5GVY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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