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80주기 / 어둠 넘어 별을 노래하다] [5] 사랑스런 추억
이숭원 서울여대 명예교수
입력 2025.05.22. 00:04 업데이트 2025.05.22. 09:31
<키워드 – 기다림>
사랑스런 추억
봄이 오던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떨어트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 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둘기 한 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 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았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동경 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 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 게다.
—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 1942. 5. 13.
지나간 일을 따뜻한 마음으로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많은 추억을 지닌 사람은 마음에 보물 상자를 간직한 사람이다. 요즘은 젊은 세대건 나이 든 사람이건 떠올릴 만한 추억이 없다고 한다. 현실에 대한 환멸감 때문에 과거를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잃은 것 같다. 우리는 마음의 보물 상자가 텅 비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사랑스런 추억’은 윤동주가 릿쿄대학을 다니던 1942년 5월 13일에 쓴 작품이다. 그는 교외의 조용한 하숙방에서 과거의 추억을 떠올린다. 현재는 “봄이 다 간” 계절이고 과거는 “봄이 오던 아침”이다. 그는 서울의 작은 정거장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장면을 떠올린다.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시절, 윤동주에게 정거장은 이별의 장소가 아니라 기다림과 만남의 장소였다. 기다리면 기차가 왔고 그는 기차를 타고 목적지로 향했다. 그런 의미에서 기차는 그에게 미래의 희망을 안겨주는 상징적 존재다.
그는 기차를 “희망과 사랑처럼” 기다린다고 했다. 기독교 신앙을 지닌 윤동주에게 가장 소중한 덕목이 사랑인데, 기다림에서 피어나는 희망을 사랑과 동격으로 표현했다. 그가 서 있는 정거장은 작고 그림자는 고달팠으나, 기다림은 사랑처럼 소중했다. 기차를 기다리는 역 주위로 투명한 햇살 속을 비둘기 떼가 평화롭게 날아오른다. 공중을 비행하는 비둘기와 환하게 비추는 햇살을 통해 희망을 품고 있던 과거의 장면을 아름답게 그려냈다.
인생의 기차는 멀리 바다 건너 낯선 곳으로 그를 데려다주었다. 하숙방 근처 기차역에도 기차가 몇 번이나 지나가지만, 아직 기다림의 대상을 정하지 못한 그는 허전한 느낌으로 그것을 바라본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정거장 가까운 언덕에서 서성거린다고 했다. “오늘도 ~ 서성거릴 게다”라는 구절은 희망과 사랑을 잃지 않고 기다림의 자세를 유지하겠다는 뜻을 뚜렷이 드러냈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라는 마지막 시행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서울의 작은 정거장 신촌역, 숲길을 걸어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연희전문학교. 그곳은 미래를 꿈꾸던 풋풋한 젊음의 공간이었다. 지금은 낯선 지역에 와 있지만 그때의 순정한 마음을 계속 유지한다면 다시 그 젊음의 공간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그는 믿었다. 윤동주는 희망을 견지하기 어려운 시대에 드물게 기다림의 자세를 유지한 귀한 시인이다.
미래에 대한 기다림이 있어야 답답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다. 그리고 추억은 미래를 꿈꾸게 하는 소중한 원동력이다. 우리에게도 과거 언젠가, 밝은 미래를 꿈꾸던 순수한 ‘젊음’의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 아름다운 시절을 떠올린다면, 다시 미래를 꿈꿀 힘이 생기지 않을까. 윤동주의 소망처럼, 우리의 ‘젊음’도 그곳에 오래 남아 있기를 바란다.
[팩트 점검]
전차 타고 경성역, 다시 신촌까지… 시인의 통학길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시절 신촌역과 경성역(서울역)을 오가는 기차를 자주 이용했던 것 같다. 윤동주가 후배 정병욱과 함께 종로구 누상동에서 하숙하던 1941년 5월에서 9월까지 윤동주는 전차와 기차를 이용해 통학했다. 이 과정은 이 시기에 쓴 산문 ‘종시(終始)’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누상동에서 걸어 내려와 효자동에서 전차를 타고 종점인 남대문에서 내려 경성역으로 와서 다시 신촌역 가는 기차를 탔다.
경의선과 교외순환선이 정거하는 신촌역은 연희전문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학생들이 이용했기 때문에 낭만의 장소이기도 했다. 훗날 정병욱은 윤동주가 같은 학년의 이화여전 학생과 “매일 같은 역에서 차를 기다렸고 같은 차로 통학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내성적인 윤동주인지라 그 여학생을 밖에서 따로 만난 일은 없지만, 기차를 함께 타는 것으로 동행의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린다는 말에 담긴 애틋한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동경 교외의 하숙방 근처에 있는 정거장은 어디일까? 일본의 윤동주 연구자 야나기하라 야스코 여사는 여러 가지 자료를 근거로 윤동주 하숙방과 정거장의 소재를 추적한 바 있다. 여사는 와세다대학 근처에 있는 다카다노바바 역으로 고증하고 역 남쪽에 작은 언덕이 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그러나 하숙의 위치는 확정하지 못했다.
[윤동주와 사람들]
윤동주의 시를 지킨 사람… 마루 밑 원고와 정병욱의 약속
서울대 교수를 지낸 국문학자 정병욱은 경상남도 남해에서 태어나 하동보통학교와 동래고보를 거쳐 1940년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윤동주보다 두 학년 아래고 나이는 다섯 살 아래였다.
그해 6월 17일 ‘조선일보’ 학생란에 ‘뻐꾸기’라는 산문을 발표했는데 이 글을 읽고 윤동주가 그의 방으로 찾아오면서 교류가 시작되었다. 경상도 해안 지역에서 올라온 정병욱과 북간도 용정에서 내려온 윤동주가 마음을 나누게 된 것은 문학적 감성이 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은 이듬해 5월부터 9월까지 함께 하숙하면서 더욱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 윤동주가 11월에 시집 출간을 계획하면서 자필 원고 세 부 중 한 부를 정병욱에게 건넸다.
윤동주는 겸손한 성격이었지만 자신의 시에 대해서는 완고해서 친구들의 조언을 거의 수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정병욱이 ‘별 헤는 밤’을 보고 끝부분이 무언지 허전한 느낌을 준다고 하자 얼마 후 한 연을 추가해 작품을 완성했다. 정병욱은 자신의 하찮은 조언에 귀를 기울여 준 윤동주에게 존경심이 우러났다고 회고했다.
윤동주는 1942년 3월 일본으로 떠났고 정병욱은 1944년 1월 졸업을 앞둔 상태에서 학병으로 징집되었다. 정병욱은 윤동주의 자필 원고를 어머니에게 맡겼고, 어머니가 그 원고를 전라남도 광양 망덕 포구 가까이 있는 가족의 사업장 마루 밑에 독을 묻고 보자기에 싸서 소중하게 간직했던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전쟁이 언제 끝날지, 해방이 언제 올지, 본인의 생환이 가능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선배의 한글 원고를 고이 간직하려 한 정병욱의 진심과 아들의 당부를 충실히 따른 어머니의 정성으로 윤동주의 정선된 19편 작품이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다.
정병욱은 윤동주가 옥사했다는 사실을 1946년 가을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정병욱은 자신이 윤동주 원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다. 여기 강처중이 보관한 원고가 더해지고 그 외의 보존 작품이 합해져 시집 출간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니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출간에 결정적 역할을 한 사람은 정병욱이다. 그는 훗날 자신이 평생 한 일 중 가장 보람 있고 자랑스러운 일이 윤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전한 일이라고 언급했다.
원글: https://www.chosun.com/opinion/specialist_column/2025/05/22/6W7TFN7ALBCONMC3EICAD2AN7M/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
'일러스트=이철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성민의 정치 포커스] 김문수·이준석 동시 상승세… 오늘 밤 TV토론 최대 분수령 (1) | 2025.05.28 |
---|---|
[만물상] 비트코인 피자 데이 (0) | 2025.05.28 |
[임명묵의 90년대생 시선] 지구촌 뉴스 공론장 된 X… 한국만 존재감이 없다 (0) | 2025.05.28 |
[만물상] '평화의 사도' 메달 (0) | 2025.05.28 |
♥[박건형의 닥터 사이언스] 왜 한국에는 대통령의 과학 선생님이 없을까 (0) | 2025.05.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