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국가보훈부
입력 2025.10.03. 00:52
[광복 80주년 단편소설] ⑦ 이승우 '조선 여자 남자현'
- 독립운동가 남자현
…작년에 나온 내 자서전 ‘학자와 코끼리’에는 주로 인도에서의 경험이 들어 있습니다. 인도는 나에게 각별합니다. 아버지가 인도 총독으로 있을 때 그곳에서 태어났고, 성장기에 케임브리지로 와서 공부를 했지만 그후 공직 생활의 대부분을 인도에서 했으니까요.
자서전이 나온 후에 적지 않은 사람이 ‘국제연맹 중일 분쟁 조사위원회’ 활동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이유를 묻더군요. 한 권 더 쓰려고 그걸 남겨놨느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어요. 물론 만주국을 세운 일본의 침략 야욕을 밝혀낸 조사단 활동이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인 건 맞습니다. 그렇지만 그 활동에 대해서는 보고서에 상세히 기술했고, 또 각국의 이해관계에 따른 처신 때문에 우리 보고서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데 대한 실망이 커서 돌이켜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다는 보고서 내용에 불만을 품고 국제연맹을 탈퇴했는데, 국제사회는 그런 일본을 제재할 힘이 없었거든요.
그러니까 그때 일을 회고하자고 다시 자서전을 쓸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면 새삼스럽게 뭘 또 쓰겠다는 건지 궁금해하는 분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노욕이라고 흉보는 분도 있고 내 건강을 염려하는 분도 있는 줄 압니다. 예순여덟 살 먹은 노인의 생일을 축하하겠다고 이렇게 찾아와 준 여러분 중에도 그런 분이 있는 것 같아 내 갑작스러운 글쓰기 충동이 어디서 비롯한 건지 이 자리에서 말하려고 합니다.
예상했지만, 만주에서 조사단 활동을 하는 동안 우리를 만나려는 사람들이 꽤 많았습니다. 주로 중국인과 일본인이었고, 러시아인과 조선인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쓸 보고서에 영향을 주려고 탄원서 같은 걸 가져왔어요. 물론 우리는 그들과 접촉하지 않았지요. 아니, 접촉이 불가능했다고 해야 할 겁니다. 일본 경찰이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을 철저히 감시했거든요. 그런데 그 감시와 보안망을 뚫고 내게 접근한 사람이 있었어요. 대단한 여자지요. 네, 여자였어요. 선교 활동을 하고 있던 사촌을 만나려고 인력거꾼을 불렀는데, 세상에, 여자가 나타난 겁니다. 처음엔 물론 여자라는 걸 몰랐지요.
이 사람이, 인적이 드문 골목에 이르러 인력거를 멈추고 대뜸 품에서 뭔가를 꺼내는데, 가슴이 덜컥 내려앉더군요. 놀라서 소리쳤어요. “누구냐?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아마 내 목소리는 떨려서 나왔을 겁니다. 그런데 인력거꾼이 안심하라는 듯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고개를 숙이는가 싶더니 머리에 두르고 있던 두건을 푸는 겁니다. 그러자 검고 긴 머리카락이 나타나더군요. 여자였어요.
의당 호통을 치며 무슨 조치든 취했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게 안 됩디다. 여자여서 그랬을까요? 무장을 하지 않은 데다가 나이도 꽤 들어 보여서 안심한 걸까요? 어느 정도는 그랬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어요. 그녀의 눈빛 때문이었습니다. 간절함과 결연함이 함께 섞여 만들어진 그런 눈빛은 전에도 못 보았고 나중에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눈빛은 호소하면서 동시에 강요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호소보다 간절하고 어떤 강요보다 결연했습니다.
“나는 조선의 독립군입니다.” 그녀가 품에서 봉투를 꺼내 내밀면서 영어로 말했습니다. 발음은 어색했지만 할 말을 외워 온 듯 또렷하고 분명했습니다. “이게 뭐요?” 나는 그녀가 내민 누런 봉투를 엉겁결에 받아 들고 물었습니다. “독립을 원하는 우리 조선 사람의 간절한 뜻을 담았습니다. 세계에 우리 뜻을 알려 주십시오.” 그녀가 그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러고 다시 두건을 쓰고 인력거를 끌었습니다.
나는 혼란스러웠지만 봉투를 열어 그 안에 든 것을 확인했습니다. 피처럼 붉은 글씨가 적힌 수건이 한 장, 그리고 헝겊에 싸인 손가락 한 마디가 나왔습니다. 세상에! 진짜 사람의 손가락 마디였어요.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 같더군요. 놀라지 않은 척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릅니다. “이게 뭐요?” 나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습니다. 그 여성이 내가 겁먹었다고 생각할까 봐 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었던 것도 같습니다. “제 손가락입니다. 염원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내 손가락을 잘랐습니다.” 그 글씨는 피처럼 붉은 잉크가 아니라 말 그대로 피로 쓴 글씨였던 겁니다. 이게 당신 손가락이란 말이오? 하는 내 물음에 그녀는 자신의 왼쪽 손을 들어 보이더군요. 넷째 손가락 한 마디가 없었습니다. “뭐라고 쓴 거요?”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습니다. “조선독립원. 조선은 독립을 원한다는 뜻입니다. 천하에 우리 뜻을 알릴 기회를 주려고 하나님이 당신을 여기 보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죽기 전에 내 조국 조선이 독립하는 걸 보는 것이 예순 살 먹은 늙은 조선 여자 남자현의 유일한 소원입니다.”
60살 먹은 여자 독립군이라니! 자기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다니! 그보다 무서운 게 어디 있을까요? 네, 솔직히 무서웠습니다. 칼을 들이댄 것도 아니고 총을 쏜 것도 아닌데, 염원을 표현하는 그 방식이 내게는 좀 충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에게 무슨 약속을 한 건 아닙니다. 만주국 수립의 허구성을 다룬 공적 문서에 조선 독립군의 요청을 넣는 건 마땅치 않은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수없이 많은 각국의 탄원을 다 반영할 수는 없는 일이었어요.
귀국하여 정치인으로 바쁘게 사는 동안 가끔 그때 일을 떠올렸습니다. 그 조선 여성의 눈빛과 끊어진 손가락 마디와 피로 쓴 글씨. 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그때 일이 떠오르면 마음이 불편해져서 얼른 다른 쪽으로 생각을 돌리곤 했어요.
그런데 자서전이 나오고 몇 달 지나지 않은 어느 날 그 여자가 꿈에 나타났어요. 꿈속에서 나는 몇 달 전에 나온 내 자서전을 읽고 있었어요. 무슨 모임이었는지 모르겠는데 스무 명 정도 되는 사람이, 지금 여러분들처럼 둥글게 모여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고, 아, 여기 계신 분들 가운데 몇 명은 그 자리에도 오셨더군요, 암튼 낭독을 하려고 책을 펼쳤어요. 그런데 갑자기 웬 여자가 내 귀에 대고, 왜 내 말을 세상에 알리지 않은 겁니까? 하고 속삭이지 뭡니까? 그녀는 속삭였지만 내 귀의 안쪽에 집어넣을 듯 가까이 대고 말했기 때문에 내게는 천둥 치는 것처럼 들렸어요. “왜 우리 염원을 무시하는 겁니까?” 놀라서 몸을 뒤로 젖히며 누구냐고 소리치는데, 이번에는 거기 모인 사람이 다 들을 수 있게 진짜 천둥 치는 소리로 “나는 조선 여자 남자현입니다.” 이러는 겁니다.
세상에! 그때 그 눈빛 그대로였습니다. 간절함과 결연함. 호소하고 강요하는, 거부하기 힘든 눈빛. 그런데 더 이상하고 거북한 일이 벌어졌어요. 거기 모인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그 여자를 따라 말하는 겁니다. “왜 내 말을 세상에 알리지 않은 겁니까? 왜 우리 염원을 무시하는 겁니까?” 대부분 내 동료인 그 사람들이 그 여자의 지휘에 따라 합창을 하며 나를 몰아치는데, 정신을 차릴 수 없더군요. 거대한 물결이 몰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항복할 수밖에요. 당신의 말, 당신들의 염원을 천하에 전하겠다고 약속하고 다짐하고 맹세하고 그러다가 깨어났는데, 얼마나 시달렸는지 잠옷이 온통 땀에 젖어 축축하더라니까요. 그 순간 땅에서 울부짖는 아벨의 피가 생각난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살인자 가인을 향해 여호와가 추궁하잖아요.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네 아우의 피가 땅에서 울부짖는다.” 짓밟힌 조선 사람들의 피가 울부짖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어요. 저들의 울부짖음을 나는, 내 일이 아니라고 방관만 하고 있었구나. 목숨을 걸고 나를 찾아와 전한 그 염원을 나는, 나와 상관없다고 외면하며 살아왔구나. 부끄러워서 꿈속에서도 울고 꿈 밖에서도 한참 울었습니다. 내가 책을 한 권 더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사연이 이러합니다…….
부기: 세계대전이 끝나고 국제 질서가 재편되는 과정에 그의 경험을 필요로 하는 기관이 많아지면서 리턴은 이전보다 바빠졌다. 특히 인도 독립과 양국 관계 개선을 논의하는 자리에 자주 불려 나갔다. 과로가 원인이었을까? 특별한 병이 없던 그는 1947년,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 자서전을 쓰기로 마음먹은 사연을 소개한 지 3년 만이었다. 그의 두 번째 자서전은 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의 68세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 참석하여 그 사연을 들은 지인 가운데 한 명이 한 신문기자에게 알렸고, 그 기자가 리턴의 2주기에 맞춰 기사를 쓴 것은 확인된다. 그 기사의 제목은 이러하다. ‘조선 여자 남자현: 손가락을 끊어 피로 쓴 독립 염원’.

공동 기획: 조선일보·국가보훈부

남자현(1872~1933)
경북 안동 출신. 3·1운동 후 가족과 만주에 정착해 독립군을 지원했다. 1926년 서울에서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 암살을 계획했지만 이루지 못했고, 1933년 무토 노부요시 주만주 일본 대사 암살을 계획하던 도중 불심검문으로 체포됐다. 옥중 단식 투쟁으로 순국했다.

소설가 이승우
1981년 <한국문학>을 통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장편소설 <생의 이면> <식물들의 사생활> <지상의 노래> 등, 중·단편집 <사랑이 한 일> <신중한 사람> <모르는 사람들> 등을 펴냈다.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받았다.
원글: https://www.chosun.com/culture-life/culture_general/2025/10/03/XW27IKCOGZFEZP2V527EGUTQRE/
일러스트=이철원 ALL: https://ryoojin2.tistory.com/category/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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